닷새후면 한국은행이 창립 50주년을 맞이한다.

그동안 정치 경제 사회의 변천에 따라 위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설립 당시 한은은 정부로부터 상당한 독립성과 권한을 부여받아,걸음마를 시작한 우리 금융을 제대로 이끌어가겠다는 희망과 포부에 부풀어 있었다.

최초의 한은법에도 이런 정신이 넘치다보니 이색적인 구절이 포함되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제22조에 "총재는 고결한 인품과 금융에 대한 탁월한 경험을 가진 자 중에서 대통령이 국무회의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고결한 인품"이 자격요건으로 되다 보니 한은 총재 되기가 대통령 되기보다 더 어렵다는 농담도 나오곤 했다.

역대 총재들 중에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채 정부나 여론의 압력에 맞서 소신을 고집해온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많은 금융계 인사들이 비리에 연루되거나 도덕적 해이로 인해 국민들의 눈총을 받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당시 법규의 선견지명이 돋보인다고 할 수도 있겠다.

금융에 대한 식견과 아울러 고결한 인품은 한은 총재뿐만 아니라 일반 은행장들도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생각된다.

최근에 선임된 국민은행과 외환은행의 행장들은 모두 한은 출신인데 그들이 구한은법의 구절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면 은행 최고경영자의 도덕성에 관해서 만큼은 남다른 소회와 각오가 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이들은 행장 추천위원회 등 여러 단계의 검증을 거쳐 적격으로 판정된 사람들이었지만 행장으로 취임하기까지의 경과가 반드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선임과정을 둘러싼 얘기들을 자세히 들어보면 우리금융의 문제점과 과제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국민은행의 김상훈 행장은 주총에서 선임되고 난 후에도 노조측의 저지활동 때문에 한동안 취임식을 갖지 못했고 행장실로 출근할 수도 없었다.

외환은행의 경우에는 은행장 후보로 유력시되던 어느 인사가 노조에 대해 강성이라는 평이 돌면서 밀리고 말았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은행장 선임이나 업무수행에 있어서 노조의 입김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된 배경은 정부의 은행소유에 관한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국내은행들은 정부가 아니면 누구도 대주주가 될 수 없게 돼 있으므로 사실상 경영을 챙길 만한 주인이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정부가 은행의 공익성을 강조해 가며 민간대주주의 출현을 막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조차 경영에 직접 개입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보니 결국은 노조가 은행의 주인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문제는 금융개혁에 관해 노조의 입장과 정부의 생각이 판이해서 앞으로 많은 마찰이 예상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노조가 가장 신경을 쓰면서 반대하고 있는 것이 은행간의 합병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국민은행장이 곤욕을 겪었던 것도 노조가 새 행장의 취임을 합병추진을 위한 사전포석으로 간주해서 반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정부에서는 제2차 금융구조조정의 핵심과제로서 은행간의 합병을 꼽고 있다.

이미 밑그림을 그려 두고 금융지주회사제도의 도입을 추진하면서 선도은행의 출현을 위해 밀어붙이고 있다.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부실한 시중은행뿐만 아니라 건실한 중견은행들에 대해서도 이합집산의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같다.

은행간의 합병에는 그렇잖아도 복잡한 절차가 뒤따르게 마련인데 은행장과 노조가 함께 이에 반발하고 나온다면 실제 합병은 부지하세월로 지체될 우려가 있다.

그 동안에 은행들이 나름대로의 구조조정 노력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구조조정이란 결국 수익성을 감안해서 점포와 인원을 줄이는 일이 대부분인데,합병이 돼 어차피 줄어들 것이라면 은행장이 노조와 싸워가며 미리부터 감축해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이 제대로 안 된다면 이미 투입된 공적자금은 낭비에 그칠 우려가 있고 추가적으로 필요한 공적자금의 규모 또한 크게 늘어날 염려가 있다.

이보다도 더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어중간한 타협안이 나와서 국민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외형적인 은행합병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정부로서는 노조에 대해 상당한 양보를 하고서라도 합병을 추진하려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노조에서는 인원감축이 없다는 조건이라면 합병안을 수용할 지도 모른다.

중복되는 업무와 인원을 줄이지 않는 한 합병이 가져올수 있는 이점은 크지 않다.

생산성의 획기적 증대 없이 덩치만 불려간다면 얼마 안 있어 운석에 얻어맞은 공룡신세가 되고 말 수도 있다.

금융개혁이 제대로 되게 하려면 정부가 합병이전이라도 개별은행들에 내부구조조정노력을 촉구해 가는 한편 실속있고 현실감있는 금융지주회사법안이나 은행합병안을 들고 나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