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신내.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고 멋진 노을과 함께 시원한 바람마저 부는 여름날 저녁.개천변은 갑자기 북적거린다.

불어난 물을 구경하는 어린이들.찬거리를 준비하는 아주머니들.막걸리내기 장기를 속개하려고 나온 아저씨들과 술 한잔 얻어먹기 위해 둘러선 사람들.개천 주변에는 장사꾼들도 모이기 마련.수박 참외장수.수건 참빗 좀약을 파는 사람.

리어카에 싸구려 가방과 지갑 벨트를 싣고 나온 사람은 하홍근 씨."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인데 왜 그리 비가 자주 오나"하고 푸념하면서도 한개라도 더 팔기 위해 목청을 돋운다.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기 때문.진주에서 올라온 하씨가 서울에서 가진 직업은 10개가 넘는다.

외판원과 막노동도 해봤고 택시도 몰아봤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전기 분야로 눈을 돌려 개발한 게 인버터스탠드.이게 히트를 치면서 국내 최대 인버터스탠드 업체인 삼정인버터를 일궈낸다.

중소기업 사장들의 과거는 다양하다.

지금은 쟁쟁한 기업을 이끌고 있지만 전직은 뜻밖인 경우가 많다.

웨이터 출신을 보자.노래방체인점 업체인 알토산업의 김용석 사장과 결혼정보업체인 선우의 이웅진 사장.김사장은 서울 강남의 레스토랑에서,이사장은 불광동 룸살롱에서 웨이터 생활을 하며 어려웠던 시절을 버텼다.

이들 역시 책외판원 막노동 등 각각 7~8개의 직업을 섭렵했다.

뻥튀기 장사 출신도 있다.

국내 굴지의 군납용 식품업체인 송학식품의 성호정 사장이 그 예.부산에서 올라와 서울 신길동에서 벌인 사업이 뻥튀기.시커멓고 둥근 쇠로 된 통에 쌀을 넣은 뒤 살살 가열해 폭발시키면 튀밥이 돼서 나온다.

굉음과 함께 퍼져나가는 연기.주위에는 어린이들이 몰리기 마련.이보다 더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구경거리가 없기 때문. 약사 출신으로는 지영천 YTC텔레콤 사장과 김광석 참존 화장품사장을 들 수 있다.

지씨는 조선대 약학과를 나와 백제약품을 거쳐 약국을 개업했다.

하지만 새벽에 문열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쳇바퀴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밤늦게 찾는 손님의 술주정을 받아주는 데도 이골이 났다.

멀티미디어 프로그램 사업을 거쳐 손댄 초소형전화기가 대박을 터뜨렸다.

청개구리 광고로 유명한 화장품업체 참존의 김광석 회장은 성균관대 약대를 나와 피보약국을 경영하다가 창업한 경우.많은 사람들의 피부 문제를 상담하며 쌓은 경험을 밑천으로 화장품업체를 차렸다.

박세진 이앤테크 사장은 거리의 화가,김삼식 대해프랜트 사장은 어선의 선장을 지냈다.

육동창 서전 사장과 정문술 미래산업 사장은 중앙정보부 출신.둘다 요직에서 일했으나 10.26사태로 함께 옷을 벗었다.

이들은 각각 고급안경과 반도체장비 분야의 대표적인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가 됐지만 사업을 시작할 때 겪은 설움을 누구보다 컸다.

중소기업인들이 경험없는 분야에 뛰어들어서도 성공한 것은 잡초정신을 가졌기 때문.바람이 불면 눕지만 잦아지면 다시 일어나는 마음가짐이다.

지금 노점상을 하거나 웨이터를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훌륭한 기업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자질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김낙훈 기자 nhk@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