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균 < 인제대 국제경상학부 교수 >

최근 소설 ''동의보감''을 드라마화한 MBC TV의 "허준"에서 스승 유의태와 제자 허준의 관계를 보면 스승은 제자에게 의(義)를 가르쳐야 하고 후학으로서 점령하고 뛰어 넘어야 할 목표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모자라는 재주는 채우면 되지만 의의 길에는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심지와 품성의 영역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면은 소설 "금시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스승 석담과 제자 고죽 간에는 형언할 수 없는 사모와 그에 못지 않은 격렬한 애증이 뒤얽혀 있다.

서도를 중시한 석담과 서예를 중시한 고죽의 예술관의 자존심 논쟁은 두사람을 한평생 애증과 번뇌로 싸이게 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스승은 항상 옳은 것, 즉 의를 가르치려고 했다.

또 제자가 가르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고 생각할 때에는 항상 냉엄한 꾸지람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승은 제자가 뛰어 넘을 청출어람의 대상물이었으며, 참스승은 제자를 용서할 줄 아는 큰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제자의 잘못을 꾸짖는 것이 쉽지 않은 오늘의 교육풍토가 못내 아쉽다.

수업태도가 불량해 플라스틱 자로 한두대 손바닥을 맞았다는 이유로 초등학생이 담임선생님을 경찰서에 직접 신고까지 하기도 한다.

중.고교에서는 수업시간에 예사로 잠을 자기도 하고 도시락을 꺼내 먹기도 한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평가하고 있어 교수는 학생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고 학생들과 어떻게든 친해볼 수 없을까 궁리하는 부끄러운 현실도 있다.

다산 정약용은 세상의 많은 일들이 문제시되고 있는 근본적 이유는 "옳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 옳으면서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일보다 우선시되어지는 혼동"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경쟁적이고 상업주의적인 오늘날의 교육풍토아래서는 의보다 이(利)를 강조하는 교육이 중시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의가 뒷받침되지 않은 지식의 습득과 이용은 인간에게 더 큰 재앙과 화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뿌리가 튼튼하지 못한 나무가 결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듯이 의를 경시한 이 중심의 가르침 또한 공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의가 중시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교육현장에 대한 책임의 상당부분은 가치관이 전도된 사회현상과 공교육 자체에 많은 책임이 있다.

하지만 과연 그뿐이랴.

가정에서의 예(禮)에 대한 기본교육도 소홀하지 않았는가.

학교에서의 인성교육이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큰 이유중 하나는 가정에서의 자녀에 대한 예 교육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최고가 되어야 한다. 일등만 해라. 뭐든지 해 주마"하는 것이 많은 부모들의 웅변이요 바람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은 예에 대한 교육은 뒷전이고 오로지 공부만을 고집하며, 내자식 만큼은 "좀 더"라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촌지를 내밀기도 하고, 교실에서 사랑의 매 소리에도 쉽게 흥분해 한달음에 교장실로, 경찰서로 달려가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교실의 붕괴, 공교육의 파괴를 가져 오는 주범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가정은 어느 것이 과연 자녀를 위한 진정한 자양분이 되는지를 한번쯤 반성해 보고 예를 통한 인성교육에 한 축을 맡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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