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멜버른의 한.호 경제세미나에서 만났던 국회의원 앤드루 톰슨은 온몸에서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는데 그의 설명이 재미있었다.

국회로 진출하기 전 그는 골프장 설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대로부터 물려받은 직업이라고 했다.

그의 부친이 아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강조한 교훈은 "훌륭한 골프 코스 디자이너가 되려면 사람들을 잘 속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골퍼들이 남은 거리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게끔 벙커나 연못을 만들어 눈을 속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사람 속이는 기술만큼은 몸에 배게 됐고 결국은 그 기술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분야,즉 정치쪽으로 직업을 바꾸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톰슨이 농담삼아 한 얘기이기는 하나 정치는 이처럼 속이고 속고 하는 불신의 분위기 속에서도 얼마든지 꽃필 수 있는 독특한 영역이라고 하겠다.

정치하고는 정반대의 분위기가 돼야 번창할 수 있는 분야가 금융이다.

사람들의 신뢰를 잃게 되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금융인 것이다.

은행들이 옛적부터 웅장한 본점 건물을 소유하는 것도 예금자들의 돈을 싹쓸이해서 순식간에 줄행랑을 칠 기관은 아니라는 점을 일반인들에게 인식시키고 믿음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전후해서 우리 금융계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금융정책을 맡고 있는 당국자들과 금융기관 종사자들이 불신을 받을 만한 일을 많이도 저질렀던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이 외환 보유액 통계였다.

일부러 속이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통계에 잡힌 금액 중에는 급할 때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외채규모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풍문이 떠돌고 있어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외환위기로 까지 치닫게 된 것이어서 그동안 외환금융당국의 발표를 믿어왔던 일반국민들에게는 청천벽력의 충격을 주고 말았던 것이다.

위기 이후 금융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금융당국은 여러번 말을 바꿈으로써 정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린 바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대우채 환매 문제였다.

대우그룹이 발행한 회사채나 CP를 보유했던 투신사들이 문제였는데 당초 정부는 원칙적으로 투자자의 책임이니 만큼 투자자가 손해를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항의 여론이 거세어지고 환매사태가 벌어지면 금융대란으로 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당국은 처음 입장을 바꾸어서 일정기간 이후 환매해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손실이 거의 없도록 조치를 취한 바 있다.

금융기관들도 고객의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을 많이 했다.

예금자에게서 받은 돈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엄청난 부실자산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실자산에 관한 통계기준을 애매모호하게 하여 부실규모를 과소 계상함으로써 금융개혁을 더욱 어렵게 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객들의 재산을 펀드형태로 받아두었다면 그 재산을 불려주는데 열성을 다해야 할 터인데도 자신들의 체면만을 생각해서 잘되는 펀드의 재산을 멋대로 뽑아 잘 안되는 곳에 밀어넣어 수익률을 평준화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골프장이라면 스코어가 잘나는 곳에 일부러 벙커를 크게 만들기도 하고 어렵다고 불평이 많은 홀에는 깃대를 편한 곳에 꽂아 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금융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5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은행의 단위금전신탁 중에는 이익은 고사하고 원금마저 일부 까먹는 경우가 생겨 은행의 신뢰도가 더욱 떨어지게 됐다고 한다.

정부는 이번에도 투자자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당국으로서도 반성해 보아야 할 일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우선 왜 은행들로 하여금 단위신탁을 취급하게 했는가 하는 점이다.

투신쪽으로 너무 많은 자금이 몰려가니 은행쪽을 편들어 주느라고 도입한 조치였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펀드관리의 경험도 충분하지 못한 은행쪽에 이런 상품을 취급하게 한 당국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일부 매니저들 중에는 목표수익률을 맞추려고 무리를 하다 결국 원금까지 까먹게 됐다고 실토하고 있다.

당국은 이런 점을 제대로 감독했는가?

일이 터지게 되면 당국이나 금융기관들은 임시방편의 미봉책들을 동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더욱 잃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대우채 때문에 투신사 자금이 빠져나가려 하자 하이일드 펀드라는 눈가림식 상품을 갑작스레 도입한 바 있다.

일부 은행중에는 단위신탁 만기자들 한테 특별 우대금리를 적용해 준다고 하며 유치작전을 펴고 있다.

모두가 아랫돌을 빼어 윗돌을 괴는 편법들이다.

이런 방식에 능한 당국자들이나 금융기관 사람들은 모두 뽑아내어 정계로 진출시키는 것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