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내 컴퓨터가 먹통이 되었다.

초기화면조차 띄우지 못하는 컴퓨터를 몇번 켰다 끄기를 되풀이 한 후에야 나는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다가 불려나온 큰 아이가 "엄만,참.오늘 26일 아녜요?"하고 딱하다는 듯 잠기 달아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컴퓨터는 말로만 듣던 CIH 바이러스에 감염된 거였다.

저장된 자료는 물론 하드까지 모조리 파괴한다는 그 가공할 위력의 바이러스!!!

아침 눈뜨자마자 전화통에 매달려 서비스센터와 바이러스연구소의 번호를 눌렀지만 한시간이 가깝도록 어느 곳과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결국 구입처의 직원에게 부탁해서 도움을 청했지만 내가 들은 것은 오늘 중으로는 방문이 불가능하다는 답변뿐이었다.

말 그대로 먹통인 컴퓨터를 보고 있자니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디스켓으로 백업을 받아놓지 못한 자투리 원고들,소설 구성안,언뜻 떠오른 단편적인 느낌을 적은 메모들이 까맣게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문득 소름이 끼쳤다.

풀 한포기,나무 한그루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변해버린 체르노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피폭 후 태어난 가축들의 기괴한 모습, 치료 불가능한 괴질을 앓는 어린아이들, 그 죽음의 땅으로 돌아가 죽음에 이르는 삶을 이어가는 어두운 얼굴의 주민들...

나는 신문 및 텔레비전에서 그들을 보았을 때와는 또다른 생생한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컴퓨터의 기억이 사라진 것만으로 이처럼 황량해지는 것을.

태어나 자라고,몸담았던 집과 거리와 사람들이 찰나에 변해버린다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단 한순간의 부주의가 대재앙을 불러오고,보듬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시대.

나는 갑자기 컴퓨터가,디지털 세상이 두려워졌다.

지금으로서는 철끈으로 묶은 원고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수리가 끝나자마자 나는 자판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내일이면 컴퓨터는 말짱한,텅 빈,깨끗한 상태가 되리라.

그 첫번째 원고의 고료는 아무래도 유니세프에 보내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