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고 빨간 꽃빛은 첫눈에 탄성을 터뜨리게 하지만 옛말마따나 그 좋은 날이 얼마 안 갈 것을 염려하게 된다.

보고 또 보거나 며칠 잊었다 봐도 안심인 것이 이 봄에 창궐한 연둣빛이다.

그것은 점점 푸르러지고,푸르러지다가 지쳐 단풍이 들지언정 꽃빛처럼 불현듯 고개를 숙이거나 허무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올 봄엔 운이 좋은지 난생 처음 그 연둣빛이 차차로 세상을 덮어가는 것을 처음부터 쭉 지켜보고 있다.

아파트 뒷산 군데군데 듬성거리던 풀빛이 새록새록 산 전체로 번져나가는가 했더니 아파트 베란다 너머 빤히 보이던 관리사무소 창 사이에,2차선 도로 너머로도 살림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파트 단지 사이에,안개처럼 어렴풋이 감돌던 연둣빛이 어느새 발을 쳤다.

그제서야 아하,거기에도 나무들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눈이 시원해지는 것은 물론이고,하늘이라도 한번 보자고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민망함까지 상쾌하게 가려준 그 연둣빛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리고 마침내 갓 태어난 아기 손처럼 쭈글쭈글하게 말려있던 연둣빛 이파리들이 어느새 엄지 손톱만큼씩 자라있는 것을 본 것은 오늘 아침,집 가까운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이제 저것이 손바닥 만하게 커진 채 푸르렀다가 노랗게 물든 다음 어느 날엔 후두둑 떨어지겠지 생각하니 이 연둣빛을 안아다가 숨기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좋은 것의 사라짐이여,사라지는 것이 싫어서 좋아할 수 없나니"라고 상심하고 안타까워 할 것은 꽃빛 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서관에 가서 어린이 열람실의 그림책들을 뒤적이다 보니 연둣빛을 붙잡지 못하는 안타까움 같은 것은 까맣게 잊혀졌다.

사자 발에 박힌 가시를 빼주고 친구가 되는 소년 이야기,매일 생일선물을 받고 싶어 고민하다가 자기 자신에게 선물하는 꾀를 생각해내는 이야기,매일 산길로 통학하는 소년이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다가 선생님의 지혜로 멋지게 까마귀 울음 흉내를 내보이면서 자신감을 되찾는 이야기,장난감 곰이 예쁜 소녀가 데려가 주길 바라면서 자기 옷에서 떨어져나간 단추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숲속에 간 아이에게 동물 친구들이 찾아오는 이야기,장난이 심해 저녁 굶는 벌을 받고 침실에 갇힌 개구쟁이가 괴물 나라에 가서 마음껏 노는 상상을 하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저녁밥 냄새를 맡고는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끔찍이도 뱀을 싫어하는 부인이 파충류 연구가 아들이 선물로 보내준 뱀과 함께 살면서 애정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요리 잘하는 꼬마 아가씨가 아빠 대신 장에 가다가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을 만나 맛있는 요리를 먹여 착한 거인으로 바뀐다는 이야기,고기잡이 나가는 아저씨 배에 동네 꼬마들과 동물들이 얌전히 있기로 하고 올라타서는 깜박 잊고 장난치는 바람에 배가 뒤집어져 엉망진창이 되지만 내일 또다시 배를 타러 오라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이야기,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 빈둥빈둥 노는 이유가 가족들이 심심할 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생각을 모은다는 설명을 듣고 그럼 넌 시인이로구나 하고 아빠가 감탄하는 생쥐 이야기,작고 작은 집 한 채가 1세기에 걸쳐 변화를 겪는 이야기,새로 태어난 동생에게만 관심을 갖는 가족들이 서운해서 가방을 꾸려 달아나려다 마는 아이 이야기...

요 몇년째 그림책을 비롯한 어린이책을 쓰고 번역하면서 이런 책들을 정신없이 읽고 또 읽는다.

우리 세대의 대부분이 그랬겠지만 그림책다운 그림책 한 권 못누리고 자란 내게 이것은 때늦으나마 얼마나 즐거운 호사인지.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그림들,대문호의 명작보다 더 가슴아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가득 찬 그림책들을 펼칠 때마다 가슴이 뛴다.

아이들의 즐거움과 기쁨을 담고서 그들의 분노와 공포를 포근하게 위로하는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영원히 어린 채로 이 세계에 겁먹고 화내고 당황하는 나를 달래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는 어른으로서의 나란 존재가 얼마나 그들에게 압박감을 주는 대상인지도 깊이 깊이 반성하면서.

그리하여 새삼스레 아이들의 그 투명하고 자유로운 행동과 뜻밖의 웃음들,이 낡은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는 눈길과 손길을 키낮춤 없이도 마주 잡아 보는 것이다.

다가오는 어린이날,아이들의 손을 잡고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의 키 작은 의자에 앉아보자.

아이들의 재재거리는 연둣빛 목소리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듣고,또 읽어주자.

봄 나무들과 인생의 연둣빛 세계 속에 뛰어놀자.

어린이날은 모두가 어린이가 되는 날이다.

saero0904@ unitel.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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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시인
<>부산여대 국어교육과
<>시집 "잘가라 내청춘""벼락무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