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진 <워싱턴 특파원>

우리는 어느새 하루하루의 주가 등락에 일희일비하며 살고 있다.

주가가 폭락하거나 폭등하면 신문 방송은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바쁘다.

"미국 나스닥이 폭락함에 따라 우리나라 코스닥도 폭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TV에 나온 한 증권회사 직원의 설명이다.

그럴 듯하다.

충분히 심증도 간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모든 개별주가의 폭락요인을 하나하나 일일이 점검해서 이를 통계화한 근거자료로 제시하지 않는 한,그런 진단은 그저 한낱 추측이거나 가설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느새 이런 추측이나 가설을 사실 또는 진실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지난 총선에서 울산동구를 빼놓고는 한나라당이 영남지역을 휩쓸었다.

정치부 기자들은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바빴다.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자 표 분산을 우려한 영남사람들이 한나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는 설명이 주류를 이루었다.

역시 가설일 뿐이다.

정말 그랬는지는 유권자들에게 일일이 물어봐야 알 수 있다.

거증자료가 없는 한 유추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만큼 박사학위 논문 제목감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선거결과도 없었다.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영남 몰표를 불러 온 직접적 요인이었는지를 검증한 논문은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테마로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최근 워싱턴을 방문,특파원들과 간담회를 가진 김영삼 전대통령은 "이번 선거는 김대중 정부의 실정,거짓말,언론탄압,(인사상)지역 싹쓸이를 심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엄밀히 말해 이 또한 통계적으로는 가설일 뿐이다.

유권자들에게 일일이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오랜 정치경륜과 감각이 갖는 프리미엄은 가설수준의 주장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치인의 통찰력이 오래된 증오심이나 편견에 오염돼 있다면 그 해악은 클 수 있다.

그의 분석과 결론이 순수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없음도 물론이다.

특파원들과의 간담회 내내 김 전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독설로 일관했다.

"김대중씨는 입만 벌렸다하면 거짓말을 해왔다"며 "약속을 어긴 적은 많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고 둘러대는 정도"라고 술회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DJ욕을 제일 많이 한 사람이 당선됐다"는 분석까지 서슴지 않았다.

외환위기가 "OECD 가입" 그리고 "개인 GNP 1만달러" 등 (속빈강정식) 정치목표와 이로 인한 인위적 환율유지 때문에 비롯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김 전대통령은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노동법 개정,그리고 금융개혁의 기초가 될 한은법 개정을 한사코 반대해 무산시킨 것이 김대중씨고 기아자동차를 국민기업이라며 퇴출 지연시킨 것도 김대중씨였다"며 책임분담론을 제기했다.

"내 뒷조사를 시키고 (아들을) 청문회에 나오게 한 것도 김대중씨"라며 "천하에 나쁜 X"이라는 극언을 써가며 강한 증오심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식물이 아니다"고 말했다.

마치 자기가 왜 독설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려는 듯한 표현이다.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오불관언 표정없이 서 있는 들꽃처럼 살지는 않겠다는 공언이기도 하다.

그는 "김대중이 독재를 하고 있는데도 야당,언론,학자 그 어느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않고 있다.

그러니 나마저 말을 안 하면 역사와 국민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누구도 그가 식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양김이 영.호남 반목의 대리인이며 그같은 반목이 두 정치인으로 인해 더 증폭될 수 있다는 "가설"을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람들은 말없는 들꽃에서 더 은은한 향기를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다.

bjnyang@ a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