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 좌청룡인 낙산이 동쪽으로,우백호인 인왕산이 서쪽으로 뻗어 있고 남쪽에는 남산이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보통 그렇게들 설명한다.

이처럼 낙산은 인왕산과 대치되는 한양도성의 내사산중 동산으로,옛날에는 중시되던 산이다.

옛 기록들을 보면 산이 낮아(해발 1백25m) 골짜기가 깊지는 않지만 기암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맑고 골짜기마다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등 상록수가 빽빽이 들어서 풍광이 수려하고 그윽했다.

그래서 조선초부터 왕족이나 문인들이 계곡근처에 정자를 지어 정원을 꾸미고 살았다.

태종때의 좌의정 박은은 지금의 동숭동에 백림정을 짓고 청한한 생활을 했다.

중종때 시인 신광한도 이곳에 살아 "신댓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화동에는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의 석양루와 이화정을 비롯 영조때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이 있어 왕족 문인들이 즐겨 찾았다.

산록에 있던 쌍계동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맑은 물이 절경을 이루어 삼청 인왕 백운 청학동과 함께 도성내 5대 명승으로 꼽혔다.

또 동촌이씨의 세거지이기도 해서 조선후기에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썼다는 비우당도 낙산에 있었다.

세종때 정승 유관이 살던 터에 지은 집이다.

어린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정순왕후와 눈물의 이별을 한 청룡사는 지금도 낙산자락에 있다.

효종때 어영대장 이완, 헤이그밀사 이상설도 낙산아래 살면서 계곡에서 청유했다.

낙산밑에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선 것은 1924년이다.

선비들 대신 학생들이 낙산계곡을 산책했다.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옛 낙산의 풍경들이다.

일제는 1940년 낙산일대 16만여평을 공원부지로 지정해 놓았다.

그뒤 서울시는 41동의 시민아파트를 산정상에까지 지었다.

서울시가 엊그제 낙산복원작업을 시작했다.

낙산의 옛모습 복원은 불가능하겠지만 6만여평의 공원이 생긴다니 이처럼 다행스런 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