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사는 어느 사나이가 하루는 길에서 신기한 물건을 팔고 있는 안경장수를 만났다.

이 특수투시안경을 쓰면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사라지고 알몸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안경장수의 선전이었다.

사나이가 실제로 안경을 착용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선전 그대로였다.

옥외는 물론 실내에서도 투시가 가능한지를 묻고 몇 번 다짐을 받은 다음 그는 기대감에 부풀어 큰돈을 치르고 안경을 샀다.

마누라에게 이 희한한 물건을 구경시키겠다는 급한 마음에 집으로 뛰어갔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2층 침실에서 인기척이 나 그가 안경을 쓰고 올라가 보았더니 침대 위에 아내와 이웃집 남자가 옷을 벗고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이 사나이는 놀라서 안경을 얼른 벗어 보았지만 여전히 두 남녀는 같은 모습이었다.

안경을 몇 번 썼다 벗었다 하던 그는 마침내 문을 박차고 나오며 이렇게 소리쳤다.

"실내에서는 되지도 않는 물건을 팔다니! 이 엉터리 안경장수 녀석을 잡아서 혼을 내줘야지"

총선이 끝난 후 꾸중을 들었다는 경제장관들의 소식을 듣고 큰 잘못없이 부대낄 지도 모를 안경장수 생각이 났다.

발족된 지 백일을 갓 넘긴 현 경제팀은 그간 무난하게 경제를 이끌어 온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 중에는 새정부 출범이래 금융과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사람들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선거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은 경제장관들의 대응이 미흡했다기 보다 주로 여당 측의 작전 실수에 기인한다는 분석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경제브레인 이한구 정책위원장이 국가부채규모 문제와 국부유출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 맞상대할 여당 쪽의 정책위원장이 강봉균 전 재무장관 또는 김태동 전 경제수석이었더라면 TV토론의 평가,나아가서는 선거의 결과까지도 상당히 달라 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영남지방에서 반감을 일으킬 만한 인사에게 선거대책위원장의 중임을 맡겼던 것이 감표요인이 됐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선거직전에 남북한 정상회담계획을 발표한 것도 과연 선거에 도움이 됐는지 의문이 일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인선과 선거전략을 잘못 짰던 여당(이야기 속의 아내)이나 지역감정(이웃집 남자)이 혼이 나야할 텐데 안경장수 격의 경제장관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니 답답한 일인 것이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자기들이 안경장수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정해주는 바에 따라 기업구조조정에 혼신의 힘을 쏟아 왔을 뿐 아니라 총선 기간 중에도 시민단체 또는 노동단체들과는 달리 불만을 누르고 은인자중해 왔는데도 선거가 끝나자 마자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주식이동조사,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 내부거래조사 등의 강력한 조치가 이들에게 소나기처럼 퍼부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국민들이 걱정하는 바는 경제장관들이 질책을 당하고 난 후에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과격한 처방을 들고 나오거나 정책의 우선 순위를 혼동하여 실제 중요한 과제보다 윗사람이나 정치권의 관심을 끌만한 과제에 집착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경제신문이 총선후의 경제과제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본 결과 민간 및 국책 연구소의 소장들은 입을 모아 금융구조조정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라고 응답한 바 있다. (한경 4월14일자)

엄청난 규모의 부실을 안고 있는 투신사들,임자도 없이 경영표류상태에 있는 은행들,이자소득에 대한 종합과세,예금보호대상의 축소,미국 증시의 널뛰기,국내 증시의 위축 등 모든 요인들이 어떻게 보면 금융시장의 시한폭탄일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가 끝났으니 분초를 다투어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해야 마땅한데도 이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오히려 재벌개혁에 관한 시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벌개혁도 중요한 과제고 꾸준히 추진돼야 한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들이 금년에 헤쳐나가야 할 어려운 환경과 그간 보여줬던 구조조정노력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예년보다 훨씬 격렬해질 춘투가 목전에 다가와 있는데다,원화가치 절상,에너지가격 상승,교역조건 악화,시장개방과 외국기업 진출등의 사정때문에 금년 하반기이후 국내기업의 채산성은 크게 악화될 전망이다.

여기에다 각종 조사와 규제의 짐까지 지운다면 생산 투자활동의 위축과 경기의 급냉각을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아직도 취약한 우리경제의 장기적 안정과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논리보다 경제논리에 맞게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대립과 강압의 수단보다는 신뢰와 협력의 방식으로 개혁과제들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