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백인홍은 저녁 6시 반경 외출 채비를 하고 나섰다.

그의 나이 27세 이후로는 한번도 걸린 적이 없는,그러니까 거의 20여 년 만에 걸린 유행성 독감 때문에 집에서 쉬고 있다가 권혁배 의원과 저녁 약속이 되어 있어 그를 만나러 갈 참이었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네 마리의 진도개가 꼬리를 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부르며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 여덟 살이 넘은 애비 에미는 왕초.

왕녕으로 제대로 이름을 붙여주었으나 그들이 낳은 두 마리의 수놈 새끼는 성호.무석이라는 그가 적으로 삼는 자들의 실제 이름을 갖다붙였다.

근친교배를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성호와 황무석이라는 자들이 괘씸하여 그들 새끼 두 마리는 태어나자마자 모두 거세해버렸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두마리의 개를 남성 행세도 못하는 병신들로 만들었지만 현실의 인간 세계에서는 그자들이 지금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는 사실이 백인홍을 언짢게 했다.

진성호는 대해실업을 무서운 속도로 확장시키고 있고 그자의 똘마니인 황무석은 진성호의 핵심 참모로 대해실업의 부사장직을 맡아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터였다.

대해실업 하청일을 할 때 갖은 행패를 부렸던 황무석으로 말하면 혼만 내주었지 육체적으로 피해는 입히지 않았지만 워낙 엉큼한 놈이라 복수할 기회만 엿보는 듯하고,진성호란 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질인지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7시가 조금 지나 약속장소인 호텔의 일식집 룸에 들어갔다.

아직 권혁배는 오지 않았다.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권위를 세우려는 수단인지 약속시간이 조금 지나 전화로 연락해 30분 정도 늦는다는 연락을 취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아니나다를까,10분쯤 후 권혁배로부터 전화연락이 왔고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하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20분이 넘도록 멍청히 앉아 기다릴 그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체면을 세울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방법으로 그는 비싼 양주를 3분의 1 정도 혼자 비운 후 약간 취한 상태로 동갑내기인 권혁배를 맞이하기로 했다.

그것이 체면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정치가와의 대화란 취중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그는 과거의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백인홍은 웨이트리스를 불러 양주를 시켰다.

잠시 후 양주가 들어와 서너 잔을 연거푸 걸친 후 느긋한 마음으로 룸 안을 둘러보았다.

문득 4년 전,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채 1년이 안 된 어느 날 점심때 모교인 K고등학교의 야구부 후원문제로 권 의원과 함께 권력자의 사돈인 윤 회장과 바로 이 룸에서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윤 회장도 백인홍처럼,13년 차이로 고등학교 시절 알아주는 야구선수였다.

그 당시 집권자의 사돈으로서 기세등등했던 윤 회장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아직도 재벌그룹의 주력기업의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고,금년 초 떠들썩하게 열렸던 한보 청문회에서도 뚜렷이 거명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민정부 초기 때만은 못하겠지만 그런대로 영향력은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