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소설가나 시인은 무슨 글이든 다 잘 쓸 것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문예창작과에 재직하는 교수들은 때로 사소한 일들에 시달린다.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예컨대 학장,이사장,학과장의 축사,인사말,전시회 오프닝 멘트,모시는 글 등을 써 줄 것을 수시로 요청받는 것이다.

의전의 인사말이라는 것이 묘해서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당사자가 보기엔 의미가 다르고 격이 차이가 나게 느껴지기 일쑤다.

단어 하나,문장 하나 때문에 몇번씩 고쳐 써야하는 상황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번 주,우리 학과에 부과된 과제는 학교 새 건물 기공식에서 낭독할 학장과 이사장의 인사말이었다.

명색 시인,소설가,그리고 문장론 전공의 교수까지 세 사람이 무려 사흘째 고치고 또 고친 글을 비서실로 보냈다 찾아오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야,옛날 같으면 명문장이라고 동문선에 올랐겠다"고 우스갯소리를 섞으며 자신 있게 보낸 글도 어김없이 붉은 줄이 그어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일부러 트집을 잡는다고 여겨질 만큼 곳곳에 붉은 줄을 그어대는 윗분들의 처사에 내가 먼저 짜증을 터뜨렸다.

"은근 슬쩍 자기 자랑도 좀 하고 그리고는 결국 고맙다,더 잘하자,뭐 이런 이야기 아니겠어요?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거야"

문장론 교수가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는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기왕 하는 거,서 선생 말마따나 표 안 나게 자랑하게 해 주자고.나쁠 거 없잖아"

나는 무어라고 더 주절주절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좇아 복사된 인사말을 눈이 빠져라 들여다 보았다.

간신히 OK 사인을 받은 후 "형식에 얽매이는 이런 일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하고 계속 쫑알대는 내게 그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참고한 대통령 신년 인사라는 거,해마다 같은 이야기였잖아.그걸 쓰느라고 몇 사람이 며칠밤을 샜겠지만 말야.그런 거지.형식이라는 것,쓸데없다 싶은 것들이 필요할 때가 있는 거야.요식 행위가 다 사라진 세상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벌어먹겠어.우리가 팔아먹는 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형식이지"

내가 슬그머니 입을 다문 것은 피곤해서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