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좋아요.

그럼 제 얘기도 들어보세요"

이혜정의 말에 진성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성호가 김명희를 추천한 것은 사실이에요.

미숙이가 저더러 인터뷰를 해보라고 했어요.

저도 솔직히 말해 소문을 듣고 있어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마지못해 인터뷰했어요.

하지만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결론을 낼 수 있었어요.

첫째,그녀가 진지하게 배우가 되고 싶어한다는 거였어요.

둘째,놀라울 정도의 재능도 소유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거기다가 맡을 역이 단역이었어요.

아마 무엇보다 제가 김명희에게서 받은 느낌은 선입관과는 달리 아주 솔직한 여자였다는 거였어요"

"혜정이 어떻게 여자의 깊은 속을 그렇게 잘 들여다볼 수 있어?

언제부터 심리학 전문가가 되었지?"

"그렇게 비꼬지 마세요.

저도 나이가 마흔이에요.

바보도 아니구요"

"혜정이 누가 바보랬어.

혜정은 내가 만난 여자 중 가장 현명하고 가장 가치 있는 여자야"

"김명희 가족에 대해 알고 계세요?"

진성구가 고개를 저었다.

"김명희의 아버지가 제가 존경하는 영화감독인 김예봉씨예요.

죽을 때 술 때문에 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그분이에요.

아주 훌륭한 감독이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

"김명희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배우가 되려는 강한 열망이 있어요.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어요.

김명희를 좌절시키고 싶지 않아요.

분명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배우가 될 수 있어요"

"김명희가 언제 연기수업을 했지?"

진성구가 빈정대듯 이혜정에게 말했다.

"예술가는 재능을 타고나야 해요.

김명희는 재능을 타고난 배우예요"

진성구가 술을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아는 이혜정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여자가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특별한 인과관계가 없는 김명희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김명희에게서 이혜정이 뭔가 보았음이 틀림없었다.

진성구의 분노가 많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현재 성호의 내연의 여자라는 사실과 과거에 백인홍이란 떨거지의 여자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잘 모르겠어.

한번 생각해볼 테니 혜정이도 미숙이와 같이 다시 의논해봐"

진성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갑자기 취기가 온몸에 퍼져오는 듯했다.

문득 이혜정과 단둘이 술잔을 기울인 지가 꽤 오래되었음을 알았다.

이혜정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볼그스름한 볼과 약간 충혈된 눈빛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티베트 여행은 어땠어요?"

이혜정이 물어왔다.

"아주 좋았어.

라마불교에 심취해 있는 티베트인의 모습을 보고 뭘 느꼈는지 알아?

종교를 믿으려면 티베트인과 같은 신앙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였어".

"어떤 점이 그랬어요?"

"오체투지례라고 며칠을 걸려서 한치의 땅도 건너뛰지 않고 온몸을 땅에 대면서 사원으로 가는 고행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지?"

이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