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반에 대만을 처음 방문하면서 한국과 대만의 두 독재자가 통치기술에 있어서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다.

당시 한국에서는 정치 또는 사회적 불안요인으로 민심이 동요하는 조짐이 있으면 정부가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국민들을 이끌어 가는 방식이 주로 사용됐다.

사건의 내용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곤 했으므로 국민들은 그때마다 충격을 받고 긴장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반면에 대만에서는 쇼킹한 사건은 최대한 덮어두거나 보도를 제한함으로써 국민들을 안도시켜 일종의 낙관적인 최면상태에 들게 하는 수법이 동원되고 있었다.

간첩 등에 의한 정부요인이나 송미령의 암살시도가 있었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대만에 입국할 때에는 일본신문을 갖고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돼 있었다.

두 가지 상반되는 통치방법의 상대적 평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치자의 의사만을 강요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쪽이나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하겠다.

정부의 물가정책도 이와 같이 대조적인 방식으로 수립되고 시행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유가격이 폭등했을 때 이것을 그대로 물가에 반영시켜 우선은 인플레 경기후퇴 실업증가를 불러오게 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이와 달리 에너지세금을 깎아주거나 예비해두었던 기금을 활용해 국내물가에는 충격파를 전가시키지 않는 방식이 있는 것이다.

최근에 재경부는 유가가 계속 오를 경우의 대처방안을 얘기하면서 당초에는 첫째 방식에 따르겠다는 뜻을 비쳤다가 얼마 안 있어 두 번째 방법으로 선회함으로써 정책이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 정도로서 문제가 일단락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과연 두 번째 방식의 선택이 옳은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하겠다.

지난 1,2월중에 물가는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향후의 움직임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

경기회복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수요면에서의 물가 압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금년 성장목표를 6%로 잡아두고 있지만 최근에 발표된 삼성경제연구소의 자료에서는 성장을 8%로 전망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원유가격이 작년 1월에 비해 3배로 상승해 있고 임금인상 압력 또한 드세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물가불안 심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시중의 과잉유동성 또한 거대한 규모에 달하고 있다.

그간의 금융완화와 저금리정책으로 형성된 유동성은 증시 활황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선거를 거치면서 인플레라는 불을 재연시킬 기름 역할을 할 위험이 있다.

물가안정이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물가안정의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물가정책은 여타 경제정책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가며 수립 시행돼야 할 것이다.

원유가격이 급등할 때 그 충격을 재정부문에서 모두 흡수해 준다면 국내물가는 안정될 것이다.

소비자들도 구매력의 손상 없이 이전과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되니 불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정수지 악화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새로운 숙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에너지 절약의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에 에너지 과소비형인 우리 경제체질은 전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기업과 가계는 경제성장과정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에너지 소비를 늘려온 결과 이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극히 비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정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중화학공업 육성책 등 일부 정책들이 국내 석유류 가격을 경직 또는 왜곡시킴으로써 에너지 소비를 조장해 왔기 때문이다.

물가안정이나 경쟁력 확보에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인 에너지 절약과 효율성 제고를 위해서는 전부 또는 일부 에너지 가격의 인상을 통해 석유류 제품의 가격구조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원유가격의 전망은 불확실하다.

그런만큼 정부로서는 가격대별로 대응 시나리오를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고 유가가 어느 상한선을 넘어서게 되면 국내물가에 반영토록 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책선택이라고 본다.

지난 1년간 원유가격이 3배로 뛰는데도 특별한 대응책 없이 물가안정만을 강조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가 답답해 보이는 것이다.

다른 정책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충격이나 곪은 데를 드러내거나 터뜨리기보다는 덮어두거나 공적자금을 들이대어 말썽 없이 시간부터 벌어보고자 하니 금융구조조정 대우문제 공기업개혁 노사문제 등 여러 부문에서 아무런 진척이 없고 이제는 정부의 개혁의지까지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선거 때니까 못하고,증시가 아직 불안하니까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