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날인 8일 민주당이 총선공약으로 성폭행에 관한 친고죄 폐지를
밝혀 주목을 끈다.

97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특별법)을
개정하면서 논란끝에 존속시켰던 친고죄를 이번엔 없애겠다는 것이다.

친고죄 유지의 근거는 피해자의 인권보호다.

그러나 여성계는 친고죄를 놔두면 피해자가 성폭력을 유발하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문제를 왜곡시키는 잘못된 관행이 고쳐지기 어렵고, 신분노출과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못하는 사태가 계속된다는 점을 들어 폐지를
주장해왔다.

어느쪽이 더 타당하다고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무조건 수사할 경우 피해자의 신분이 드러나고 조사 도중 수치심을 유발하게
될 것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성폭행사건을 다룬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에서
주인공은 성폭행을 피하고자 가해남자의 혀를 깨물었는데도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과 싸늘한 눈초리에 시달린다.

지난해 봄 대검찰청이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운동 백서"를 펴내면서
성폭행당한 여학생들의 신상을 밝힌 것 또한 수사당국의 인권경시를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알려지면 망신이니 웬만하면 가만히 있는게 상책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건 성폭력 예방이나 퇴치에 도움이 될수 없다.

성폭력은 피해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정파괴로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사회범죄
다.

성폭행범죄를 줄이자면 무엇보다 피해자가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신고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먼저다.

그러자면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가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죄"
즉 "동의하지 않은 성을 침해한 범죄"로 규정해 성폭력이 신체 사회적인
강자가 약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성폭력범죄를 "강간과 추행에 관한 죄"로 규정하고 피해자에게 "목숨을 건
반항"을 요구하는 한 친고죄 폐지는 그야말로 선언적 의미외에 아무런 효용도
지니지 못한채 여성에게 "원치 않는 수사"라는 또다른 굴레만 안길지도 모를
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