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간경제협력위원 ]

1970년초 주한미국대사관 경제공사가 "왜 일본하고만 "민간경제협력위원회"
를 만들었느냐"는 항의에 김학열 부총리가 나섰다.

김 부총리는 필자에게 "김 부회장, 나를 도와줘야겠어. 우선 주한미국대사관
의 오해를 풀어주시오. 민족주의는 무슨 민족주의야, 한국이 미국을 제쳐놓고
일본과 손잡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야"

김부총리는 상기된 표정을 가라앉힌 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미국과
민간경제협력위를 구성할 수 있겠소"

김 부총리의 이런 질문에 필자는 "대통령의 결심을 우선 받으시오. 다음은
내게 맡기시오. 주한미국대사관측을 독촉해서 추진할테니"라고 답했다.

김 부총리는 "대통령 양해는 걱정마시오. 내가 수일내에 받을테니까"라고
말했다.

실제 3일도 되기 전에 그는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필자는 민간의 일은 민간의 힘으로 추진해 성사한 뒤 정부에 알리는 게
순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번에는 첫단계부터 정부가 참여했다.

이렇게 된 바에는 일을 좀 크게 벌이자고 생각했다.

"김 부총리, 관민경제사절단을 조직해서 미국에 갈 생각 없소. 물론 한.미
민간경제협력위원회 조직문제도 있지만 한.미간의 현안이나 새 구상을 끌어내
교섭하자는 것이지요"

이로써 미국파견 관민경제사절단 구상이 추진됐다.

안건으로 경제분야만 추려봤다.

김 부총리가 이미 제창한 4대 핵공장 건설구상, 종합제철, 기계, 조선 등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측이나 세계은행에서 적극성을 띠지 않는
프로젝트들이다.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인 종합제철 문제를 집중 협상키로 했다.

그런데 준비가 무르익을 무렵 김 부총리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미국사절단 계획도 주춤했다.

서로 의기투합해 멋진 일들을 꾸며보려고 했는데...

결국 김 부총리는 췌장암으로 1972년 1월3일 별세했다.

필자로서는 좋은 친구이자 정책동반자를 잃었다.

김 부총리와 친밀한 사이였으나 정책상 티격태격할 때도 없지 않았다.

1971년봄으로 기억한다.

당시 김용완 전경련 회장은 이렇게 물었다.

"김 부회장, 우리가 무슨 민간주도경제를 제창했소"

필자는 "아니, 지난 4월30일 정기총회에서 민간주도형에 부응할
"1970년대 과제"라는 종합건의를 발표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사실 이 건의는 언론과 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근래 제주도 시찰도중 김성곤 국회 재경위원장
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아니 전경련이 무슨 단체요. 정당이나 국회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야"

민간주도경제 운운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김 위원장으로부터 전해들은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정부 정책을 원칙적인 차원에서 좀 비판했기로서니..."

근대화의 요체인 다원화와 분권화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임으로 태완선 부총리가 부임했다.

취임 사흘도 안돼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김학렬 전 부총리에게는 정책조언을 많이 했다고요. 저도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필자는 "영광입니다. 성의껏 조언해 드리지요. 당분간은 새 정책을 생각할
것 없이 김 전 부총리가 시작한 것을 그대로 추진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릴테니 한.미 민간협력위원회는 꼭 성사시키십시요"라고 말했다.

태완선 부총리는 취임 2개월도 안돼 미국에 가게 됐다.

주한미대사관측과 원조처가 주선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필자가 김학렬 부총리에게 건의한 경제사절단이 추진된 것이다.

다만 관민합동이 아닌 관중심의 사절단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필자의 동행을 부탁해왔다.

당시 태 부총리의 최대관심사는 종합제철 시설조달을 미국측과 교섭하는
것이었다.

한.미 민간경제협력기구 설립은 청와대 오원철 기획단장이 맡았다.

그는 이 기구가 설립된 뒤 한국측 위원회 이사장에 필자를 추천했다.

필자가 발상한 것이니 초대 이사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필자는 망설임없이 거절했다.

전경련에서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초대 이사장에 외무차관을 지낸 문덕주씨가 취임했다.

<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