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추곡 약정 수매" 계약을 맺은 농민들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이
계약을 파기했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도됐다.

추곡 약정 수매는 추수 때 일정량의 쌀을 미리 정한 값에 사고 팔기로
정부와 농민들이 맺는 계약이다.

이 계약에 따라 농민들은 상당한 선급금을 이자없이 받는다.

만일 어떤 농민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는 연리 7%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농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그러나 수혜자들인 농민들 가운데 일부가 그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엔 분명히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농민들의 처지가 워낙 어려우므로 그런 개선은 조그만 것일지라도
진지하게 추구돼야 한다.

추곡 약정 수매 제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선택권
계약 (option contract) 의 변형임을 깨닫게 된다.

농민들은 일정량의 쌀을 일정한 시점에 일정한 값에 팔기로 정부와 계약을
맺었지만 쌀 값의 상승이나 다른 이유로 매도 시점에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그들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선택권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선택권의 값은 그가 선급금에 대해 치르는 이자다.

추곡 약정 수매는 선물 거래에 관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은 관리들이 고심
끝에 찾아낸 제도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렇게 재발명된 제도는 대개 원시적이어서 정상적 제도로 바꾸는
것이 거의 언제나 좋다.

자연히 선택권 계약의 원시적 변형인 추곡 약정 수매 제도를 정상적 선물
거래로 바꾸는 것은 여러 모로 바람직하다.

먼저 선물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 쌀에 관한 정부와 농민들 사이의
거래가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선물 거래 시장이 형성되어서 여러 이점들이 나올 것이다.

당연히 선택권의 값도 크게 낮아질 것이다.

선급금에 대해 연리 7%로 무는 이자는 선택권의 값으로는 아무래도 비싸다.

다음엔 법과 질서의 확립에 도움이 된다.

현행 제도 아래서 농민들이 선택권을 행사하려면 일단 계약을 깨뜨려야만
한다.

따라서 현행 제도는 법과 질서에 적대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계약을 깨뜨리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정상적 선물 거래가 이뤄지면 이 문제는 말끔히 가실 것이다.

셋째, 쌀에 대한 선물 거래는 다른 농산물들에 대한 선물 거래로 확대될 수
있다.

선물 거래의 필요성은 실은 쌀보다도 채소나 과일이 더 크다.

쌀은 경작지와 수요가 대체로 일정해서 생산량과 값이 비교적 안정적이다.

반면에 채소나 과일은 과잉 생산과 흉작이 번갈아 나오고 값도 크게
출렁거린다.

채소와 과일에 대한 선물 거래가 정착되면 농민들은 선택권 거래를 통해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

넷째, 선물 거래의 정착은 농산물의 생산량을 안정적으로 만들 것이다.

지금 농산물들은 쌀을 빼놓고는 모두 과잉 생산과 흉작이 번갈아 나온다.

그래서 출하 비용도 못 건진다고 작물을 갈아서 엎는 일과 채소가 금값이란
불평이 번갈아 나온다.

선물 거래가 정착되면 어떤 작물에 대한 선물 거래의 양은 실시간으로
집계되므로 과잉 생산이나 과소 생산의 가능성이 이내 파악돼 농민들이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특히 선물 가격과 선택권의 값은 파종 예상 면적에 반비례하므로 파종
면적에 대해 조절 기능을 자동적으로 수행할 것이다.

이런 사정은 농산물 선물 거래소의 개설을 바람직하게 만든다.

기후와 병충해에 큰 영향을 받고 작황에 따라 값이 크게 출렁거리는 터라
농업은 어떤 산업보다 위험이 큰 산업이다.

그렇게 큰 위험을 위험감수자 (risk-takers) 들이 농민들과 함께 나누어
지도록 하는 것이 농정의 기본이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농민들이 진 위험을 나누어 질 수가 없어진 터라
농산물 선물거래소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농민들은 그렇게 큰 위험을 분산하는 데 큰 관심을 가졌었다.

그래서 파생 금융 (derivatives) 은 농업 분야에서 먼저 나왔다.

선물 거래소를 상징했던 "시카고 거래소(CBOT)"는 농산물 거래소로
1848년에 설립됐다.

실은 이미 17세기에 오사카에 쌀의 선물 거래소가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 아직 농산물 선물 거래소가 없다는 것은 마음이 씁쓸해지는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부산 선물거래소가 설립된 터라 우리 나라엔 농산물 선물
거래를 위한 바탕이 이미 마련돼 있다.

부산 선물거래소가 일거리가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농산물 선물
거래 제도는 농민들만이 아니라 부산 선물거래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