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공대 응용화학부 석유화학공학연구실.

플라스틱 같은 고분자 화합물을 만드는 중합실험이 한창이다.

연구실 한쪽 구석에 가루가 들어 있는 30여개 시험관이 눈에 띈다.

줄지어 놓여 있는 시험관에 대해 박사과정 학생 C(30)씨는 "중합실험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석달이 지났지만 고체 분말의 분자량 분포도를 측정
하지 못해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분포도를 측정하는데 필요한 고온 GPC(분자량측정장치)가 서울대엔 한 대도
없기 때문이다.

C씨는 "S사나 H사 등 GPC가 있는 대기업 연구소의 "양해"를 구해 연구결과
를 뽑아 낸다"고 설명했다.

석유화학회사에 취직해 있는 선배들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것이라
기업연구소 사정을 봐 가며 실험실 연구를 진행한다고.

연구실 지도교수인 이화영 교수는 "고온 GPC는 응용화학부나 섬유고분자
공학과 등 공대는 물론 화학과 같은 자연대의 실험에도 꼭 필요한 기본장비"
라며 "실험 데이터를 그때 그때 뽑아볼 수 있는 "실습" 실험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밝혔다.

현장감 있는 교육을 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여건이 그래도 낫다는 서울대가 이런데 다른 대부분 대학의 실정은 말할
것도 없다.

실습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공대에서 산업체 적응능력이 뛰어난
엔지니어를 배출할 리 만무하다.

전경련은 공학교육의 문제점으로 졸업생들의 산업체 현장 적응능력이 부족
하고(42%) 전공실력이 매우 뒤떨어진다(26%)고 지적했다.

삼성그룹은 이공계 출신 신입사원 재교육에 연평균 8백억원을 쏟아붓고
있다.

실제 산업 현장에서 "쓸모있는" 공학도를 키우기 위해 한국 공대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 교육인프라 투자 늘리자 =학계에선 하나같이 실험 실습 기자재가 절대적
으로 부족하다고 말한다.

서울대 공대의 경우 9천5백93개의 연구장비중 10년 이상 된 기자재가
2천6백5개, 5년이상 10년 미만인 장비가 1천7백72개로 전체의 45.7%에
달한다.

1억원이상 되는 고가 장비는 42개로 0.4%에 불과하다.

장비 구입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서울 E대의 경우 두 연구소가 동시에 NMR(핵자기공명) 장비를 신청
했다.

부산 P대도 같은 기자재를 중복 구입하는 등 동일 대학내에서 신청기자재
품목에 대한 조정기능이 없다.

장비만 문제가 아니다.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30.4명이나 되는 서울대 공대는 미국 MIT(9.5명)
독일 아헨대(11.1명) 대만 대만공과대학(17.8명) 등 선진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교수 1인당 연구비도 마찬가지.

한국의 공대 가운데 교수 1인당 연구비가 가장 많다는 KAIST
(한국과학기술원.1억9천1백만원)도 MIT대(약 5억7천7백만원)의 3분의 1 수준
이다.

<> 현장감있는 커리큘럼 구성하자 =대학 교과과정이 산업체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내용을 다루는 것도 문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산학협력을 통해 기업이 대학 커리큘럼 구성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미국 MIT처럼 산업체에서 근무하며 학점을 취득하는 "공학현장실습 5년제
학.석사과정"을 운영하는 등 커리큘럼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교수를 기업으로 파견시키거나 업체 근무 경험을 가진 인력을 교수로 임용
하는 등의 산학 인력 교류도 필요하다.

김창경 한양대 공대 교수는 "산업체에서 수년간 일하며 현장경험을 쌓은
박사학위 취득자가 공대 교수로 임용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산업체 근무 경력을 제대로 인정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금동화 KISTEP(한국과학기술평가원) 연구사업관리단장은 "각종 실험과
프로젝트가 많은 공대에선 과제발표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수조건"
이라며 "프로젝트 발표(presentation)나 제안서(proposal) 작성 등을 집중적
으로 가르치는 교과과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공대 평가 시스템 바로 세우자 =대학의 평가기준을 개선해 교육 수준을
높여야 한다.

강광남 STEPI(과학기술정책연구원) 원장은 "지금까지의 대학 평가는 각
학문의 특성을 무시한채 똑같이 정량적인 평가기준을 적용해 왔다"며 "다양
하고 전문적인 교육환경을 조성할 유인책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대학이 질적으로 성장하려면 교수의 연구실적이나 SCI(과학논문 인용색인),
논문 게재수 등 양적인 기준뿐 아니라 산업체와 학생의 의견이 반영된 "질"
적인 평가 기준도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US뉴스&월드리포트가 매년 실시하는 대학평가 기준에는 학생이나
학부모 등 "수요자" 중심의 평가항목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가중치 25%)은 "학문적 명성".

각 대학 총장이나 학장에게 자신의 자녀들에게 추천할 만한 대학이 어디
인지를 물어 산출해 낸다.

또 신입생 졸업률과 잔류율을 통해 "교육과정에 대한 만족도"를, 졸업생
기부율을 기준으로 "학교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해 주요 평가항목으로 삼고
있다.

< 이방실 기자 smile@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