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 < 미국 네브래스카대 경영학 석좌교수 >

많은 희망과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새천년이다.

지난 세기에 한국은 찬란한 업적을 이루기도 했지만 존망지추를 겪기도
했다.

멀게는 주권을 상실하기도 하고 동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었으며
가깝게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었다.

극심한 부침을 보인 지난 세기였다.

한마디로 본격적인 근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세계무대에 등장한 지난 세기
내내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온 느낌이다.

어떻게 사느냐보다 무얼 먹고 사느냐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경제성장에
쏟았다.

21세기엔 어떤가.

경제 측면에서 더욱 치열한 경쟁구조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경제위기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가르쳐 주었다.

내실없는 양적인 성장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것을.

결과만을 중시하는 성장으로는 언제 위기가 또 닥칠지 모른다.

요즘 한국의 상황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면 이런 우려를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무슨 감사, 감독, 관리위원회가 증설되고 강화된다는
소식이다.

부정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부정을 저지른 개개인을 적발하고 처벌함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부정을 없애자는 의도로 보여진다.

그러나 감사와 감독을 강화함으로써 부정을 퇴치하고자 하는 접근법은
경영학에서 많이 연구돼 온 검사에 의한 품질관리와 유사하다.

사후 검사에 의한 품질관리는 제품이 완성된 후 불량품을 골라냄으로써
좋은 품질의 제품만이 고객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후 품질관리로 좋은 제품을 골라낼 수는 있지만 이를 생산할 수는
없다.

생산과정이 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게끔 만들어져 있지 않는 한 언제든지
불량품은 나오게 돼있다.

몇년전의 일이다.

한국의 연구진과 함께 유수 국책기관이 발주한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실무진이 제공한 승진 관련자료를 바탕으로 승진 결정여부가 제대로
이뤄졌나를 검토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60% 정도만이 타당하게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무작위로 승진을 시켜도 약 50%가 적중한다고 했을때 이 결과는 10% 정도
만이 심사기준에 맞게 승진시켰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도 미심쩍어 인사담당자에게 전 부서의 승진관련자료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상한 대로 이를 거절, 전조직으로 조사를 확대하지는 못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공표된 승진 결정요소가 제대로 평가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들이
승진을 결정하는 단계에서 거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했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인사권자의 주관적인 판단기준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필자는 이를 그 기관의 인사권자 일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싶지 않다.

자의적인 운영을 가능하게 한 불투명한 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결정요소보다 인사권자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한 주장이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가치판단일지라도 명확한
하나의 결정요소로 자리잡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제도자체가 신뢰성을 얻을 수 있고 자의적인 일처리는 사라질
수 있다.

운영자의 주관을 완전히 봉쇄해 놓은 제도를 만든다는 건 어느 조직에서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제도의 선진성은 운영자의 자의적인 적용을 어디까지 막느냐에
좌우된다.

그래야 사람은 떠나도 제도의 공정성은 보장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제도를 살펴보면 현실과 거리가 먼 일반적인 규정으로 포장된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담당자의 해석여하에 따라 일의 성사여부가 결정되고 이는 담당자의
막강한 힘의 원천과 직결된다.

당연히 일자체에서 보람을 찾기보다 일을 통해 얻어지는 부수적인 수입에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부정은 싹트게 마련이다.

허술한 제도는 놔둔 채 담당자의 윤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볼 수는 있으나 근본해결책은 될 수 없다.

일의 결과만을 가지고 시시비비는 가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과론적인 접근법만으로는 올바른 근로자를 양산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있게 직무를 수행하는데 장애가 되고 근무분위기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공명정대한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일
처리 과정을 확립해 놓을 때 우리가 원하는 근로자상은 저절로 양성될 수
있다.

나라가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정된 자원을 좋은 제품이나
서비스의 생산과정에 효과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일을 수행하는 데는 필요악들이 많다.

여러 규칙, 관례, 국민의 정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비생산적인 분야에 자원을 많이 쓰는 나라일수록 퇴보한 것을
우리는 세계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의 정치 경제 교육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불필요한 규제를 점차적으로 줄이고 새로운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과학
기술 연구 문화 생산과정 혁신 등에 자원을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정치, 경제도 부정을 저지를 수 없는 체계와 과정의 쇄신에
중점을 두고 비생산적인 감사기능에 자원을 허비하지 말아야 할 때가 됐다.

사정에 의한 정치의 현실은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서 아직도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 srhee@unlserve.unl.edu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