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함북 웅기군 서포항 선사 유적에서는 60년대초 "뿔피리" 1점이
출토됐다.

우리 신석기 시대의 유일한 음악유물이다.

또 지난 97년 전남 광주 신창동에서 가야금을 닮은 BC1세기께 목제악기가
발굴됐다.

중국사서에서는 변한 과진한에도 오늘날의 거무고 비슷한 슬이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 고대악가는 실물이 만아 있는 것이 거의 없고 기록도 영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토기나 고분벽화, 범종 등에 연주하는 모습이 더러 남아 있어
그것들을 통해 어느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구려고분벽화에는 가로로 부는 젓대 같은 횡적,단소나 퉁소 비슷한
장소 등의 관악기와 거문고, 오현비파 등의 현악기가 보인다.

중국이나 서역의 악기까지 수용하고 있는 높은 수준임을 알수있다.

당에서 고려의 음악을 "고려기"라는 하나의 장르로 인정했을 정도였다.

특히 왕산악이 진 나라의 칠현금을 개량해 만든 검누고는 신라로 전해져
옥보고 같은 대가를 낳았다.

백제의 악기에 대한 기록은 거으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본에 노래부르는 악공이나 악사 악기를 전해주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구려 못지 않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백제인 미미지가 일본에 기악무를 전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는 음악문화가 뒤져 있었다.

가야인 우륵이 진흥왕때 신라에 전한 가야금이 유일한 악기로 신라음악을
대표했다.

그러나 삼국통일후 고구려와 백제 당의 악기를 받아들여 풍부한
악기편성으로 토착 향악의 전통을 확립시켰다.

현재 국악기 종류는 통틀어 60여종에 이른다.

그중 우리오 혈맥이 통하고 호흡이 맞는 악기는 역시 거문고 가야금
젓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95년 대전 월평산성에서 발굴된 백제 목제품속에서 뒤늦게
6세기께 가야금을 찾아앴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 관심을 끈다.

비슷한 시기의 신라토기에 장식된 가야금과 흡사해 복원도 가능하다고 한다.

삼국시대 악기로는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귀중한 유물이 국악에 새바람을
몰고 오길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