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상생의 원리"를 확대해석하고 구체화시켜 주창한 인물은
구한말 민중종교사상가 강증산(1871~1909)이다.

그는 선천과 후천을 말하면서 선천을 상극의 원리, 후천은 상생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로 규정했다.

특히 그는 미래에 올 후천을 "해원의 시대"라고 강조하면서 역사적으로
쌓여온 여성들의 한을 풀어주어야만 참된의미의 후천개벽이 가능하다고
주장해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에 대한 평가야 어찌됐든 구한말의 한 촌부가 오늘날 페미니즘의 확산을
정확히 예측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상극을 극복하고 상생을 도모함으로써 인간의 이상향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은 강증산만은 아니다.

원불교의 창시자였던 소태산의 경우도 그랬다.

그는 "상극의 마음이 활름 불러 들이는 근본이 되고 상생의 마음이 복을
불러들이는 근본이 되어지니라"고(대종견)해 선한 인연을 만들어 갈 것을
권하고 있다.

상생의 원리는 중국의 음양오행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일찌기
우리나라에 들어와 혼란기인 조선조 후기에와서야 민중종교 사상가들에
의해 심화되고 구체화되는 특징을 보인다.

강증산이나 소태산에 앞서 동학의 최제우나 일부 김항의 정역사상에서도
해원상생의 후천개벽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부터 매스컴에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상생"이란말을 간간이 쓰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정치인들도 덩달아 "상생의 정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한국의 2000년 화두가 "상생"인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생이란 말처럼 좋은 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생이란 인간끼리의 상생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우주 자연과의 상생, 신과의 상생이 더 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종교적 개념의 말이 상생이다.

단순히 개혁시대에 상대방의견의 존중이나 극한대립을 피하기 위한 협력만을
뜻하는 그럴듯한 말이 아니다.

정치에서의 상생은 영원한 숙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