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유대/노인 공경은 인류사회 보편적 가치 ]

인도 출신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야 센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최근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체계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센 교수는 최근 미국 하버드대에서 특별 강연을 갖고 "아시아적 가치는 곧
인류 보편의 이념"이라고 주장했다.

권위 존중이나 인간 관계 및 가족간 유대의 중시, 노령자에 대한 공경 등은
인류사회에 공통적으로 내재돼 있는 보편적 가치관이지, 아시아와 같은
특정 지역의 전유물로 폄하되거나 평가절하돼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센 교수의 강연 내용을 소개한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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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미국인들은 정치적 자유, 시민 권리, 민주주의 등을 서구 문화의
산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그릇된 생각이다.

구미의 지식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서구 민주주의와 서구식 자유 같은
표현들은 왜곡된 우월감의 표출일 뿐이다.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인가.

민주주의면 그냥 민주주의이지, 거기에 서구(Western)라는 관형사가 앞설
까닭은 없다.

한번 생각해 보자.

유럽 각국과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매 상표처럼 사용하고 있으나 이
국가들이 과거 식민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얼마나 탄압
했는가.

마찬가지로 "아시아적 가치"라는 표현 역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집단 계율과 근면, 동질성에 대한 중시 등은 인류가 다함께 추구해온 가치
이지 아시아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를 "아시아적 가치"라고 말하는 일부 서구지식인들의 내면에는
"그러니까 아시아는 봉건적 잔재에 젖어 있다.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아시아를 과연 유럽과 같은 단일 문화권으로 묶을 수 있는지 여부도 한번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아시아는 싱가포르 중국 일본 인도 등 다양한 인종과 국가로 구성돼 있다.

주요 종교를 봐도 이슬람과 불교, 힌두교와 유교가 혼재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인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따지고 보면 "아시안"이라는 말처럼 모호하고 흐릿한 개념도 없다.

"아시안"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아시아 사람들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국민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아시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달리 자신들을 설명할 만한
마땅한 표현이 없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아시아적 가치란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아시아적 가치를 정의하는 방법으로 크게 세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인 개념이다.

둘째로는 현대적 의미이다.

셋째는 아시아인들 스스로의 개념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아시아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가치란 있을 수 없다.

한 예로 교육열을 보자.

흔히 교육에 대한 집착을 대표적인 아시아적 가치로 꼽는다.

그러나 서구의 정치 지도자들도 교육환경 개선을 끊임없이 주창하고 있다.

노령자에 대한 공경이나 효도만 해도 그렇다.

구미의 일부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공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미 국가들에서 노령자들은 많은 사회적 혜택을 받고
있다.

교통편을 비롯해 공공 시설을 이용할 때 노인들에게는 요금을 할인해 주거나
요금을 면제해 주는 혜택이 주어진다.

많은 서구 국가들에서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여전히 다수의 젊은이들
이 노인들에게 좌석을 양보하고 있다.

개인의 권리와 사회에 대한 개인적 의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선인가.

흔히 아시아인들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서구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를 더
중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구에서도 생각이 올바른 사람들은 사회적 책무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 도출을 아시아적 가치의 하나로 꼽지만 독일의 정치권이나
기업 사회에서도 "컨센서스"를 매우 중시한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특정 지역의 전유물인 것처럼 왜곡하면 부작용을
낳는다.

아시아의 몇몇 독재자들이 권위 존중이나 사회적 합의중시 등을 아시아적
가치로 제시하며 전제 정치의 구실로 삼고 있는 것이 살아있는 예다.

과거 일본의 기업인들은 종업원들을 최우선시하는 경영 시스템 등을 일본식
경영으로 자부했다.

또 특정 기업간의 부당한 내부거래를 "게이레쓰(계렬)"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하려고 애를 썼다.

인간 관계를 중시하고 가족간의 유대를 존중한다는 아시아적 가치에 편승한
행태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시스템은 장기간에 걸친 경기침체와 함께 자취를 감춰
가고 있다.

나는 정치가 됐건, 사회나 경제 분야가 됐건 아시아적 가치란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시아와 유럽, 미국의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이 강조해야 할 것은 인간의
권리와 사회적 의무에 대한 인류 보편의 가치여야 한다.

특정 지역을 편가르는 가치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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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 1933년 인도 벵골 출생
<> 캘커타.캐임브리지대 졸업
<> 옥스퍼드.하버드대 교수 역임
<>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 현 케임브리지대 교수
<> 주요저서 : "집단적 선호와 사회복지" "경제적 불평등" "선호, 후생,
평가" "윤리학과 경제학" 등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