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재삼은 "화합"에서 생명 탄생의 신비로움을 이렇게 노래한다.

"술렁거리는 무수한 신록이 없었더라면/ 땅이 심심해 어쨌을까나/ 소슬하고
찬란한/ 별들이 박히지 않았더라면/ 바다가 외로워 어쨌을까나/ 땅과 바다의/
몸부림이 있고 나서 비로소/ 땅은 아름다워지고/ 바다 또한 아름다워졌느니/
사랑이여/ 너 숨이 찬 신록이 있고/ 너 출렁거리는 별이 있고/ 요컨대
괴로움이 있고 나서/ 이승에 아름다움을 보태게 되는가"

묵은천년을 보내고 새천년을 맞는 순간에도 새 생명은 태어났다.

새천년준비위가 인정한 국내 첫즈믄둥이는 안양 한림대 성심병원에서 출생한
사내아이지만 알려진 곳에서만 비슷한 시간에 10여명이 고고지성을 울렸다.

즈믄둥이가 아니어도 아기는 무한한 축복의 대상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느냐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선인들의 무수한 모습이 증거하거니와 중요한 건 탄생이 아니라 삶이다.

아담과 이브에게도 세상은 전환기였다고 하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세상으
로 바뀌는 새 천년초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 또한 그만큼 확대될 것이 틀림없다.

햄릿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잣알갱이속에 갇힐 수도 있고 자신을 광활한
공간의 왕으로 만들수도 있다.

또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얘기같이 모래알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우주를 보며, 손안에서 무한을, 한시간안에 영원을
담을 수도 있다.

즈믄둥이들을 이처럼 끝없이 펼쳐진 희망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은 가족과
사회 국가의 몫이다.

캐나다 이력서엔 사진과 생년월일 성별 출생지와 본적을 적는 곳이 없다.

이력서만 보곤 백인 여부와 남녀 노소를 구분할수 없도록 해 서류심사에서
차별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우리의 즈믄둥이들이 만만찮은 삶속에서 때로 좌절하고 실패하더라도 시간과
노력이 가져다줄 마술을 믿는 사람으로 우뚝 설수 있도록 괜찮은 세상만들기
에 우리 모두 힘을 아끼지 않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