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이끌어갈 사상은 무엇인가.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됐던 20세기에는 수많은 사상들이 출현했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역사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제3의 길'' ''카오스'' ''복잡계'' 등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세계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려는 이론들도 나왔으나 정연한 체계를 갖춘 하나의 사상으로
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적 가치를 바탕으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접목을
시도하는 ''공동체주의'', ''보편윤리를 통해 사회진보의 가능성을 찾는 ''담론
철학'', 생명과학과 의료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가져온 윤리문제를 다루는
''생의 윤리학'', 자연과 인간과의 친화를 모색하는 ''노자사상'' 등이 21세기를
주도할 사상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21세기를 선도할 사상으로 "공동체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공동체주의는 자본주의의 이념적 동반자인 자유주의가 초래한 폐단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확보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공동선과 유대, 미덕과 헌신, 인격의 함양 등과 같은
전통적 가치를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다양한 "공동체"의 수립을 통해 자유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도덕의
공동화" 현상에 대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참다운 자유는 공동체 안에서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게
공동체주의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이다.

공동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학자는 미국 고등과학원의 마이클 월저 교수.

그는 "나라마다 여러 공동체가 있고 이에 기초한 "여러 가지 정의"(가치)가
존재한다"면서 "가족 교회 등 공동체의 다양한 가치를 활용하면 자유주의의
전횡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이론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복합평등론"과 "복합평등 사회".

월저는 "서로 다른 가치들이 다양한 기준에 의해 분배되는 사회"를 복합
평등 사회라 지칭한다.

그는 분배 영역을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 부와 상품,직장과 직위..." 등
11개로 나눠 제시한 뒤 "독점"과 "지배"라는 말로 복합평등론을 풀이하고
있다.

"독점"은 한 영역에서 중요한 가치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지 못하도록 대부분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지배"는 한 영역의 가치가 다른 영역의 가치를 지배하는 것이다.

월저는 복합평등론의 핵심을 "독점은 막지 않지만 지배는 막는 것"이라며
"이는 돈을 버는 것은 자유지만 돈으로 권력을 사지는 말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월저는 또 "돈과 같은 하나의 가치를 중심으로 평등상태를 유지하려는
평등주의는 강력한 국가 개입을 부르고 최소 정부를 주장하는 자유 지상주의
는 돈의 지배를 강화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한국적 상황에서 공동체주의 사상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또
어떤 한계를 갖는가.

황경식 교수(서울대 철학과)는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와 국가 중심의
사회주의가 모두 21세기 대안으로서 비판받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체주의는
대안적 철학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박정순 교수(연세대 철학과)도 "고위 공직자의 직권 남용, 공과 사를 구분
하지 않는 사회지도층의 영향력 행사 등 자본주의의 악성 문제점을 골고루
갖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월저의 이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반면 김영욱 박사(한국언론재단.사회학)는 "공동체주의는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인 부의 "독점"을 비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공고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이승환 교수(고려대 철학과)도 "극단적 공동체주의의 입장을 취하면 전체
주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다"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함과 동시에 공동선의
추구라는 조화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의 이념이 아닌 "보편윤리"를 통해 사회진보의 가능성
을 모색하는 "담론철학"도 관심을 끈다.

"담론"이란 사회적 의사소통을 통해 도출된 합의를 뜻한다.

담론철학은 사회적 불평등을 권위와 명령이 아닌 이성에 바탕을 둔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는게 골자다.

즉 합리적 사회공론을 어떻게 형성하고 이를 수행할 실천이성의 토대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모색하는 사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칼 오토 아펠 전 프랑크푸르트대 교수가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오늘날 많은 국가들에서 빈곤과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며
"신자유주의도, 국가 사회주의의 계획경제도 21세기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아펠은 또 "근대철학의 가장 큰 오류는 개개인만이 철학적 인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선험적 유아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 뒤
"이를 여러 사람의 생각을 중시하는 "의사소통의 공동체"로 대체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그는 "사회적 체계속에 담론철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법치국가를
전제로 한 사회적기구, 담론윤리를 만들고 지속시킬 수 있는 공공성, 세계
차원의 공공성을 보증할 수 있는 국가간의 연합이 형성돼야 한다"고 강조
한다.

이밖에 일종의 응용철학인 "생의윤리학"(Bio-Medical Ethics)은 최근
영.미 문화권의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생의윤리학자들은 생명과학과 의료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져온 윤리적인
문제들에 집중한다.

급격한 사회구조의 변화 속에서 철학자들은 전통적인 절대적 도덕률만으로는
더 이상 복잡한 난제들에 대처하기 어렵게 됐으며 이에 따라 생명과 의료
윤리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생의윤리학이 출현한 것이다.

이 사상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생명과 의료 상식에 대한 반성 및
비판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생의윤리학자들은 피임, 불임수술, 임신중절, 자살과 안락사, 출산 전
성별감별 및 생명복제, 유전자 조작 등과 관련해 이에 대한 정당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어떤 사상이 새 밀레니엄을 이끌어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대립과 갈등을 줄이고 인류 공동의 번영에 도움을 줄 사상이 새롭게
부상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수많은 논의 가운데 어떤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효과적인지에 대한
모색은 철학자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풀어야할 과제다.

< 강동균 기자 kdg@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