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 소설가 >


새로운 천년의 해돋이 시점에서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말들은 대체로
희망적이다.

멀쩡했던 가정들을 무너뜨리고 가장들을 삭풍이 몰아치는 거리로 내몰았던
외환위기가 극복되고 있다.

부도 사태와 구조조정으로 끝간 데 모르고 추락할 것 같던 우리 경제에도
새로운 활기가 되살아나고 자긍심과 추진력에 가속도가 붙어 벌써 아랫목
온돌은 뜨끈뜨끈한 상태가 됐다.

그래서 온기가 윗목까지 미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예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남다른 포부와 기백을 가진 젊은 세력들이 다가오는 밀레니엄 정보시대
신지식과의 정면 승부를 위해 밤을 새우기 시작하면서 빌딩의 불빛들은 밤
늦도록 꺼질 줄 모른다.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모멸스러웠던 우리들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불과
2년만에 어떻게 이토록 놀라운 경제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긴장감을 가질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 같다.

그런 경제적 성과나 성취감의 뒤란에는 필경 탄력이 붙은 경제폭풍이 경황
중에 놓치고 간 허구나 그늘의 흔적이 뚜렷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 실업률이 감소했다지만 고용구조는 오히려 나빠지고 있다.

정규직이 늘어나기보다는 임시직이나 일용직이 늘어난 까닭이라고 한다.

그래서 빈부 격차는 오히려 심화됐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벤처기업의 범주에 속하는 인터넷 상거래에서 벌써
소비자들을 유혹해 한몫 챙긴 다음 교묘하게 자취를 감춰버리는 사기수법까지
등장하고 있다.

코스닥 시장의 과열도 이성적인 시선으로 지켜보아야 할 대목이다.

외국 자본이 무분별하게 밀려듦으로써 우리 경제의 건전한 기반과 정체성이
필요 이상으로 잠식되거나 훼손될 우려도 적지 않다.

바로 이런 것에 우리가 긴장감을 가져야 할 필연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 우리들의 화두는 태만하지 않은 가운데
들뜨거나 떠들지 말며 바쁘게 달려가야 한다는 것에 급급해서 신발의 좌우를
바꿔 신고 뛰는 철부지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년 전에 우리가 겪었던 경제 위기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만든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다.

내용은 없고 겉만 화려한 것에 미련하게 현혹돼 있었던 그때의 황당무계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2년 전의 교훈이었다.

얼마전에 한 편의 영화를 보았다.

암과의 오랜 투병생활로 이젠 어린애처럼 몸이 쪼그라들고 머리칼이 빠져
죽음을 코앞에 둔 어머니가 미혼의 딸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한마디의 말은
소박하기 그지없어 눈물겨웠다.

"너의 결혼식에는 너무 많은 사람을 부르지 마라. 아이들을 들러리로
세우면 분위기가 산만해진다. 행복하기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을 소중하게 알면 행복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너무 그리워하지 마라"

우리들이 경험하는 크고 작은 비극들을 살펴보면 사소한 것을 정말 사소하게
생각했었던 것에서 비롯됨이 적지 않았고 가질 수 없는 것에 탐닉하고 연연함
으로써 빚어진 경우들이 많았다.

이른바 고결하고 존귀해야 할 삶이 추잡스럽고 수치스러워지는 것은 대체로
분수에 넘치는 탐욕 때문이다.

그것을 망각하고 지나치는 경우 비극이라는 결과가 가차없이 우리들을
망가뜨려 왔었다.

우리가 지나쳐선 안될 것 중에는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혹은
이웃에 대한 인식과 대응이 매우 살벌하거나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
이다.

이웃을 보듬어 안고 쓰다듬어 주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오직
피비린내 나는 경쟁 상대로만 알게 돼버렸다.

그래서 네가 하면 반드시 나도 해내고 말겠다는 이전투구의 뒤틀린 경쟁
심리가 만연하게 됐다.

네가 해외여행을 떠나면 나도 반드시 가야하고 네가 잘나간다는 평판을 듣게
되면 어떤 야비하고 사악한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나도 잘나간다는 평판을
듣고야 말겠다는 이판사판의 사회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이런 올곧지 못한 풍조가 만연하면 필경 결과에만 급급한 나머지 과정은
허섭스레기가 되고, 사소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되고, 남의 말을
좋게 하지 못하며, 가질 수 없는 것에 탐욕을 부려 스스로의 삶이 어느덧
황폐해지고 절망에 이르는 자업자득을 얻게 된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한다 해서, 그리고 가공스런 초고속 정보화
시대가 코앞에 있다 해서 인간의 진솔한 삶의 본질이,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정체성이 천지개벽을 맞이한 것처럼 송두리째 달라질 것은 없다.

내 가정을 지키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과 길을 찾아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찌그러지고 황폐화된 모습으로 행복을 발견했을 때 스스로에게
보내야 할 증오와 절망을 생각해야 한다.

다만 이런 첨단시대에 우리의 시간이 담겨져 있다는 이성적 깨달음을 갖고
숙연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일자 ).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