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짤막한 TV 코미디 한토막.

코미디언 배일집씨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온 얼굴에 콩죽같이 흐르는 땀을 훔치며 목욕탕을 뛰쳐 나온 배씨가
주인에게 거친 항의를 한다.

"아니 남녀 공동탕이라 써 붙여 놨으면서 왜 여자는 하나도 없고 온통
남자들만 북적거리는 거요?"

흥얼거리며 두툼한 돈뭉치를 세던 목욕탕 주인은 능청맞게 맞받는다.

"남녀 공동탕은 맞는데 여자들이 안오는 걸 난들 어떡하란 말이오?"

음흉한 남정네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목욕탕은 실제로 여자가 한명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난리속처럼 북적거린다.

혹시 누가 하나 들어오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감, 거기에 뭐가 있더라는
소문만으로도 족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을 하고 발길을 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 얘길
듣고 오는 사람도 있다.

한동안 뜸하다가 혹시나 싶어 또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간 갖다준
돈이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목욕탕 주인은 연일 돈으로 목욕을 한다.

주식 시장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과열 거품 고평가 등등 논의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고치를 경신하며 난리법석
을 떤다.

기업의 내재가치니 적정주가니 하는 현학적인 단어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다 갑자기 하한가를 맞으며 경계론자들의 체면을 세워주나 싶더니
어느새 다시 끄덕끄덕 고개를 쳐든다.

양철깡통 벙커안에 컴퓨터 몇대를 갖다놓고 열심히 키보드를 똑딱거리는
회사의 주식이 몇만원을 호가한다.

만원 밑에서 허덕이는 세계 굴지의 재벌기업과 비교할라 치면 도무지 말이
안된다.

회사이름이 정보통신 관련 냄새만 풍겨도 연일 상한가다.

소위 우량주라해서 손절매도 못하고 있는 내 주식을 쳐다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들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한군데 나사가 풀렸나...

그게 아니다.

모두 지극히 정상이고 너무나 인간적이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묘한 요행심으로, 이글거리는 탐욕으로, 한 순간 도둑
처럼 엄습하는 공포감으로, 매일매일 천당과 지옥을 들락거린다.

연일 신고가를 만드는 나스닥의 미국 사람들이건 날만새면 죽자사자
코스닥시장에 매달리는 한국사람들이건 다 똑 같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순간순간 최대한의 기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혜의 결정체다.

우리보다 IQ가 백배는 더 높다.

때론 능글맞기도 하고 때론 잔인하기도 하다.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고 한번씩 짓밟기도 하고 제멋대로다.

짧은 지식이나 경험 논리를 가지고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바보다 외치면서 따라다니고 피해다니는 것이다.

오르면 사고, 내리면 팔고, 아니다 싶으면 빨리 도망치고, 운이 좋아 맞으면
기다려 보는 것이다.

똑똑한 채 하다간 또 당하고 만다.

시장은 거대한 산이다.

정복하려는 자에게는 무시무시한 산사태로 대응한다.

경외하는 자에게만 정상을 허용한다.

그래서 진정한 산악인은 정복이란 단어 대신에 입산이란 용어를 사용한다고
했던가.

시장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 현대증권 투자클리닉센터 원장 한경머니 자문위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