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필규 < 산업1부장 >

우월감과 열등감은 한 동전의 양면이라고 한다.

얼핏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 상반된 감정이 사실은 동일한 뿌리를
갖고 있다는게 정신분석학자들의 주장이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정신분석학의 이같은 결론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수 있다.

평소 지나치게 거만한 사람이 어느 순간엔 놀랄 정도로 비굴해지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우월감과 열등감은 일종의 "정신적 사대주의"에서 비롯된다.

실력과 자신감 결여에서 나오는 독립성 상실이 바로 그 요인이다.

한국사회엔 극단적 우월감과 열등감이 혼재해 있다.

교만에 가까운 자기만족 성향을 보이다가 때론 비굴하다고 할 정도로
자기비하의 경향을 나타낸다.

이 양가 감정은 IMF(국제통화기금)사태에 따른 경제 위기 이후 더 증폭되고
있는 추세다.

한국인의 우월의식은 "세계 최대, 사상 처음"이라는 단어를 애용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기업들은 신제품 개발이나 생산시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놓았다거나 세계
최대라는 점을 가장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우월 전략"이 소비자들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또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외국 언론의 기사나 외국인에
대해선 특별한 반응을 보인다.

반대로 경제 상황이 나빠지게 되면 "역시 한국인은 안돼"라는 목소리가
커진다.

한국이 곧 망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도 형성된다.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산업들은 외국에서 핵심 부품을 전부 수입해
써야하는 "속빈 강정"쯤으로 격하된다.

시대적으로 보면 많은 무역흑자를 낸 80년대 후반에서 반도체 호황이 정점에
달했던 95년까지는 자만심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 뒤 경기가 나빠지고 IMF 관리체제에 들어서면서 극단적 패배의식이
뒤덮었다.

지금은 다시 우월감으로 바뀌고 있는 단계쯤으로 볼수 있다.

극단적 감정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수 있는 "균형된 눈"을 갖지 못하게
함으로써 많은 폐해를 초래한다.

잘못된 정부 정책을 양산하게 하고 개인 생활에도 투영된다.

이 극단적 우열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바라보는
데서 출발해야한다.

그래야 정신적 사대주의를 탈피할수 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 과연 우리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인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만한 실력과 자격이 있다.

이 자부심은 기업가정신을 가진 경영인, 성실히 일하는 수많은 민초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성과에서 비롯된다.

사실 지난 2년간의 위기 가운데에서도 한국은 괄목한만한 기록을 세웠다.

6년만에 일본을 제치고 세계 조선 시장 1위를 탈환했다.

D램 S램 등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TFT LCD(초박막 액정표시장치)에서 확고한
세계 1위에 올랐다.

멕시코 이란 등 해외 대형 플랜트 수주에서도 강력한 경쟁자인 일본을
연달아 제치고 연전연승하고 있다.

세계 최대 휴대폰 생산국으로 휴대폰시장의 3~4대중 한대는 한국산이다.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방식 휴대폰과 전화장비는 세계시장의 6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디지털TV 등 차세대 정보가전 제품 분야에서 선두업체로 뛰고 있다.

인터넷 사용인구도 6백만명을 넘어서 세계 10위를 기록했다.

이 모두 한국 경제와 한국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의미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물리학의 "불확정성 정리"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가 내놓은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인간의 주관적
이고 심리적 행위가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나의 마음가짐이 나를 둘러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만약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한국은 안된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그렇게
될수 있다.

반대로 "한국은 가능성이 있다"는 의식이 일반적이라면 실제 현실도 그런
방향으로 움직인다는게 하이젠베르크의 결론이다.

흔히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바로 한 사회나 집단, 기업의 미래가
소속원들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20세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한 원로경제인은 요즘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올바른 판단을 가능하게 합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가 세운 회사의 전국사업장에는 이 말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데서 비롯되는 자신감과 이를 바탕으로 한 담담한 마음
새천년 희망의 경제를 위해선 바로 이 원로 경영인의 지혜가 필요한게 아닐까

< phi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