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엔리코 카루소(1873~1921)는 천재 성악가의 대명사다.

그의 초년은 그러나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나폴리 빈민가에서 태어나 열살때부터 공장잡역부로 일했고 기껏 만난 성악
선생 베르지네는 그를 돈벌이도구로만 여겼다.

기본교육을 못받은 카루소는 첫오페라 도중 대사를 잊고 시작부분을
놓친데다 목소리까지 갈라졌다.

공연은 취소됐고 카루소는 성당 솔리스트로 되돌아갔다.

1895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데뷔했지만 여전히 고음부에서 불안하던
그의 목소리는 지휘자 빈센초 롬바르디를 만나면서 급변했다.

다소 서정적이고 감상적이던 목소리는 열정적이고 윤택하고 여유있게 변했고
그 결과 그는 오페라계의 전무후무한 신화로 남았다.

앨토 캐슬린 페리어(1912~1953) 역시 초기엔 인정받지 못했다.

영국의 시골마을에서 전화교환원으로 일하던 그는 지방대회에서 낙선하자
노래를 그만뒀다.

하지만 결혼뒤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에 대한 오기로 도전한 콩쿠르에서
입상, 런던에 진출했다.

로이 핸더슨에게 기초를 다진 다음 브루노 발터를 만나 "대지의 노래"를
연주하면서 그는 말러 가곡의 대가로 자리잡았다.

예술이란 타고난 재능에 본인의 노력과 훌륭한 선생의 조련이 더해져 빛을
발한다.

카루소와 페리어의 성공은 천부적 목소리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한 끈질김의
결과지만 인재를 발견하고 키우는 스승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시철이 되면서 음악대학의 입시부정문제가 다시 불거져 시끄럽다.

비리를 막기 위해 대학별로 교차 채점하도록 했더니 아예 타대학 교수들끼리
서로 봐주는 품앗이 부정을 저질렀다 한다.

유사이래 제도가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 해도 이쯤 되면 정말 할 말이
없다.

물론 성악은 듣기에 따라 평가가 다를수 있다.

테너 카루소와 비욜링,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의 음악을
같은자로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다.

음색이 어떻든 전공교수가 참된 재목을 발견못할리 없다.

카루소와 페리어같은 성악가를 발굴하는 스승은 없는건지 궁금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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