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완에서의 사절단 활동 ]

타이완 이국정 경제장관의 브리핑은 계속된다.

이 장관은 장개석 정부의 첫 치적으로 경제안정과 토지개혁을 꼽았다.

사실 중국 본토에선 지주들의 저항으로 "경자유전" 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을
단행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전후 경제혼란으로 악성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켜 빈부격차는
극에 달했다.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정권을 빼앗긴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장개석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기자 마자 토지개혁(50년)과 경제안정에
총력을 쏟았다.

이어 타이완은 52년 제1차 4개년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한국은 북한 공산군에 밀려 부산지역을 최후 교두보로 사투를 벌이고
있을때였다.

우리는 타이완보다 꼭 10년뒤인 62년에 제1차 5개년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지난 30여년간 물가 금리 환율 등 경제안정 기틀을 마련하지 못하고
결국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맞게 된다.

다시 이국정 장관의 설명-.

타이완은 50년대초반부터 토지개혁과 비료 증산으로 미곡 및 사탕생산이
급증했다.

이 두 품목 수출이 연간 1억달러를 넘었다.

이에 미국 원조 1억달러를 합치니 국제수지가 균형될 수 밖에...

한국의 제1차 5개년계획 목표년도인 66년 수출은 2억5천만달러였고 대만은
5억4천만달러였다.

한국과 대만의 무역수지적자는 각각 4억3천만달러 달러, 8천6백만달러였다.

타이완은 미국 원조와 해외화교 송금을 합치면 경상수지는 흑자가 됐다.

당시 느꼈던 타이완 경제의 건전성에 대한 부러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타이완 기획원의 "4개년 계획" 작성 실무진을 만났다.

기획원에 6개국이 있었는데 종합기획국을 제외한 나머지 5개국은 해당 분야
기술자 내지 엔지니어가 국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만 종합기획국장만 이코노미스트였다.

놀라웠다.

한국은 지금까지 엔지니어가 경제기획원 국장에 있은 적이 별로 없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현 정부관리중 엔지니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박정희 정부
때보다 더 낮아졌다고 한다.

아직도 한국은 조선시대의 문관우위, 사농공상의 전근대적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국정 장관에 대해 한가지 더 첨가할 게 있다.

80년대초 필자가 "기술개발금융회사" 사장으로 재임중 미국 실리콘벨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안내하는 한국 유학생이 타이완 이국정 장관이 이곳에 와 있다고 알려줬다.

1주일간 머물면서 이곳 첨단기술동향을 살피고 화교기업인 및 학생들과
의견을 주고 받고 있었다.

목적은 실리콘벨리를 모방해 세운 타이완 "신죽과학단지"에 공장과 과학자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타이완이 IMF 파동에도 끄덕하지 않은 것은 첨단성.효율성.유연성을 모토
(Motto)로 하는 신죽과학공업단지의 기업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서 한중경제협력위의 중화민국(타이완측) 위원장이 될 구진포 회장을
만났다.

구씨는 중국공상협진회 회장이고 타이완 시멘트그룹의 대주주다.

구회장은 해방전 타이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대학 대학원,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한 명망있는 지식인이다.

국민당 최고 상임위원(27명), 특히 중국인민공화국과의 협상 창구인
해협양안관계협회의 타이완측 대표이기도 했다.

필자와 구회장은 한중경협위 구성에 즉각 합의하고 68년5월 서울에서 1차
합동회의를 갖기로 했다.

당시 구진포 회장의 두가지 지적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국민당 정부는 소위 서강 지주 재벌로 인해 본토에서 공산당에 패했으므로
타이완에서는 재벌을 키우지 않는 정책을 써왔습니다. 또 해외 화교와의
연계와 라오반의 기업가정신이 펼쳐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라오반"은 주인이라는 중국말로 기업주를 말합니다"

이 라오반 정신과 해외 화교 네트워크가 오늘날 타이완 수출 중소기업의
중추가 되고 있다고 구회장은 상세히 설명했다.

<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