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 < 문화평론가 / 평택대 교수 >


역사의 어느 시대든 순교자들은 있었다.

1930년대 윤동주는 "일제의 폐허 앞에서 십자가를 안고 피흘려 죽고 싶다"고
노래했다.

70년대는 급격한 산업화의 역기능으로 저임금 공장노동자가 분신자살했다.

80년대는 역사의 진보를 위한 실천으로서 청년의 순결한 피를 요구했던
시대였다.

그러면 세기의 그믐 앞에 선 90년대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저항해야 하는가.

시대를 앞선 선각자들은 항상 역사의 투사였고 푯대를 든 자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는 그 무엇의 정체도 찾을 수 없는 미망에 빠져
황지우처럼 흐린 날 주점에 앉아 있는 것인가.

90년대 억압이란 무엇인가.

억압이라는 은유는 억제돼야 할 솟구치는 힘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90년대는 억압보다는 오히려 억압으로 인해 증폭된 힘의 반발이
물표면으로 떠오른 시대이다.

여성이나 소수민족의 문제, 성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성은 수세기동안 숱한 지배와 예속의 구조속에 놓여있던 가장
오래 숨겨진 우리의 무의식이다.

지배문화에 대한 가장 도발적인 반역은 대부분 성을 매개로 한다.

최근 사람들은 서갑숙의 책을 사러 서점에 간다.

바로 조금 전 베스트셀러였던 김지룡이 서갑숙으로 바뀐다.

김지룡은 얼마전 MBC 대토론회 "우리의 성, 어디로 가는가"에서 패널리스트
로 나와 토론회가 끝날 즈음 "청소년 여러분, 여기 나온 어른들 말을 믿지
마세요. 여러분의 행복은 여러분이 찾으세요"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가방끈 길이의 차이, 여성을 보는 편견 가운데
서갑숙이 존재한다.

여성의 성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이 문화전사 내지 문화투사로서의 전위적
고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개항 이후 백년이 지나도록 벗어나지 못하는 유교적 엄숙주의의 계몽적
꾸짖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 체험을 부추기는 이 시대의 보이지 않는 "문화적 포주"의
존재에 대한 것이다.

유명인의 책을 대신 써준다는 출판계 일각의 추문을 감안하다면 서갑숙 책의
경우 출판을 부추기며 서갑숙을 문화적 성 상품으로 고용한 출판계의 포주가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포주는 여자를 고용해 손님들로부터 많은 부가가치를 누린다.

그러나 짧을 수밖에 없는 여자의 인기가 떨어지면 여자는 너덜너덜 해어진
늙은 몸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다.

산업화 이후 우리가 스스로에게 끝없이 되뇌었던 말은 인간의 상품화에 대한
저항 혹은 부속물로의 전락에 대한 거역이다.

물론 가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상품화되는 자신의 몸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프로 선수들과 연예인들의 "몸값"은 그것의 첨예한 예증이다.

서갑숙은 이제 여성의 성과 육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유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포르노에 대한 문자적 결과물은 "문화적 포주"에 의해 개성과 자유의
이미지를 유포하고 권장한다.

하나 "자유"와 "저항"은 상품에 덤으로 얹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상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서갑숙은 대중적 운동가도, 피를 흘린 순교자도 아니다.

서갑숙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포르노 비디오를 공개하겠다고 말한다.

그녀가 포르노 비디오를 공개한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대항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저항문화가 아니라 유혹문화일 뿐이다.

오히려 지겨운 포르노의 퇴화된 엉덩이 반복에 불과하다.

우리의 허위 욕망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며 다가오는 자유의 얼굴을 한
"자본의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김지룡과 서갑숙의 책이 더욱 소비의 과잉성을 불러 일으킨 것은 그것이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는 점이다.

세상은 온통 실재로서의 "성"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에 헐떡이고
있다.

신혼부부들이 자신의 나신을 찍는다.

그러나 이 생산과 소비의 강박적 억압속에 결국 주변에 "성"은 없고 "성"
이라는 "이미지"와 "허구"만이 무성할 뿐이다.

O양은 없고 O양의 비디오 영상만이 있다.

서갑숙은 없고 서갑숙이라는 "상품"과 "담론"만이 들끓고 있다.

성을 포획하고 있는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의 얼굴을
본다.

괴물의 파시스트적인 소화력은 이 세기의 마지막을 사는 우리에게 어쩌면
어떤 순교적 피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피를 바쳐서라도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순결한 외침, 온전히 자기
안의 내적 정직에서 비롯되는 투쟁의 목소리가 90년대 마지막 제전에 바쳐져
야 한다.

< yhkim@ptuniv.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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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이화여대 국문학 박사
<>평택대 교수
<>저서:기호는 힘이 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