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배 < 정치 부장 >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이 연일 터져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 일들이 온통 의혹투성이다.

진실은 하나일진대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전국민을 향해서.

참으로 통 큰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 뿐이다.

한 사람 속이기도 어려운데 4천 몇백만명의 국민을 속이겠다고 덤비니
이쯤되면 가히 기네스북감이다.

사단은 한나라당 정형근의원이 언론탄압용이라고 주장하며 7쪽짜리 문건을
국회본회의단상에서 흔들 때부터 시작됐다.

마감시간에 바쁜 신문들이 이 기사를 대서특필했음은 물론이다.

청와대와 여당이 격분했고 이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우여곡절 끝에 작성자와 전달자가 공개됐다.

작성자는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와 관련이 있고, 전달자는 정형근 의원으로
부터 거액의 돈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캐면 캘수록 이런 커넥션들이 하나씩 속속 그 부끄러운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권-언 유착이 사실적으로 증명됐다는데서 그 충격이 증폭되고
있다.

정치권력과 언론이 이런 관계라면 이 나라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많은 사람들이 비분강개하고 있다.

그동안 정권과 언론이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속에서 지내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이 때문에 언론이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는 말에도 항변 한번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리나라 언론만큼 줄기차게 불의.부정과 싸워온 사례도 세계역사상 그리
흔하지 않다.

일제 36년, 자유당정권, 유신독재, 5.6공을 거치면서 숱한 역경을 겪었다.

폐간되고 정간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해도 수많은 기자들이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협박을 당했다.

끝까지 저항한 기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에 내동댕이 쳐졌다.

양심적인 많은 기자들은 스스로 붓을 꺾기도 했다.

그 아픔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아픔은 곧 우리사회의 정화제로 승화돼 민간정부가 들어서는 촉매제가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자를 변명하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사안의 본질을 찬찬히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정형근의원이 폭로한 언론문건은 전달자로 밝혀진 이도준씨가 속해 있는
평화방송에서조차도 방송하지 않은 것이다.

특종을 생명으로 하는 언론사에서 폐기당한 문건이었다는 얘기다.

이것을 정 의원이 폭로할게 있다고 오랫동안 뜸을 들이면서 언론의 관심을
끌더니 마침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작성자를 지목했고 말을 바꿔가며 전달자를 흘렸다.

열흘이상의 기간이라면 문건의 신뢰성여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시간
이다.

더구나 정 의원은 과거 정권에서 정보와 수사의 베테랑으로 커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가 이 문건의 진위나 가치를 몰랐을리 만무하다.

정 의원은 사건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정치적인 공방으로 소기의 목적을 거두면 된다는 오판을 했을 수도 있다.

그는 한나라당의 간판처럼 돼가고 있다.

그가 한 사건을 폭로하면 총재이하 모든 의원들이 나서서 방패가 돼 주기에
바쁘고 그의 말을 해석해주기에 분주하다.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이번 언론문건사건에 두 기자가 연루된 것은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사안이다.

언론윤리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언론의 신뢰성에 먹칠이 가해졌다.

도덕성을 결여한 "펜"이 잘못 쓰여질 때 "흉기"가 된다는 사실도 또 한번
확인됐다.

이 사건이 터지자 사회분위기는 양비론으로 흐르고 있다.

정치권이건 언론이건 다 그렇고 그렇다는 식이다.

그러나 언론은 꾸준한 자정운동을 벌이고 있다.

촌지 향응사건이 터질 때마다 각성을 촉구하는 언론 및 사회단체들의 압력과
양심적인 선언들이 나오고 있다.

이번 언론문건사건에도 몸둘바 모르는 기자들이 많다.

도매금으로 내몰리는 현실에 변명 한마디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다.

물론 양식있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 수십년동안 정통성이 없는 정권속에서 굳어진 정치인과 언론인간의
관행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고리를 떼는 방법을 지금부터라도 강구해야 한다.

기자가 특정 정치인에게 잘 보여 입신출세 하려 한다거나, 정치인 또한
기자를 자기의 홍보요원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이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언론.정치 모두가 살아 있을 때 사회는 힘차게 맥박친다.

언론의 비판정신과 정치의 봉공정신이 합해져 시너지 효과를 낼때 사회발전
은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이제 새천년은 두달 앞으로 다가왔다.

새 시대를 맞아 벗어야 할 옷은 구태이고, 설빔으로 준비해야 할 과제는
양심과 정의의 회복이다.

< youngbae@ 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