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코코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마드모아젤 샤넬은 늘 자신있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몸에 꽉 조이는 답답한 코르셋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켰으며 패션의 개념을
대중화하는 등 현대 여성복의 기초를 샤넬이 만들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되새겨본다면 이런 자신감이 지나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패션전문가들은 디자이너 코코 샤넬과 그가 만든 브랜드 샤넬을 빼놓고
20세기 패션사를 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오늘날까지도 샤넬만큼 단지 몇가지 요소만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 디자이너는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 예로 샤넬라인(무릎 바로 아래 길이의 치마선), 샤넬 재킷(실용적인
포켓의 트위드 재킷)처럼 일반적인 패션용어에 이 디자이너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탄생후 60여년간 샤넬이 브랜드가 아니라 스타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처럼 패션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지만 인생의 시작은
행복하지 못했다.

183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가난한 행상인의 딸로 태어난 가브리엘 보네르
샤넬은 12세때 어머니를 가난과 결핵으로 잃고 고아원과 수녀원 등을 전전
하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까무잡잡한 피부에 정열적 외모를 지닌 샤넬은 스무살 무렵부터
타고난 스타로서의 끼를 발휘한다.

낮에는 온천에서 치료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길어다 주고 밤에는 싸구려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샤넬을 수많은 남성들이 흠모하게 되었다.

그중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 에티엔느 발상은 샤넬을 상류사회로 이끌어
주었다.

이후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이 젊은 여성의 주변에는 소설가 시인 배우 등
당대의 스타일리스트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들었으며 특히 코코가 보여주는
개성적인 옷차림에 반해버리고 만다.

샤넬은 배우인 이모와 친구들을 위해 만들기 시작한 모자가 점점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전문 숍을 오픈, 패션업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세계1차대전이 발발하자 남성대신 일해야 하는 여성들을 위해 샤넬은
헐렁하면서도 자유롭고 유연성이 뛰어난 여성 스포츠웨어를 만들었다.

그는 또 여성들에게 남성 승마복과 같은 편안한 여성 정장을 입혔다.

이처럼 남성복에서 빌려온 디자인으로 여성적 스타일을 창조해 낸 게
샤넬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다.

활동적인 샤넬 스타일은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이는 당시로서는 의류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샤넬의 또다른 공로는 토털 패션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메이크업에서 향수 액세서리,그리고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샤넬은 여성의
외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자 했다.

지난 71년 코코가 죽은 이후에도 이 브랜드에 대한 여성들의 신뢰는 식을줄
모르고 있다.

잠자리에서 무엇을 입느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샤넬 No5만 입는다"고 대답한
마릴린 먼로의 얘기는 샤넬에 대한 여성의 충성심을 단적으로 드러낸
에피소드다.

지금의 샤넬 하우스는 2명의 거장이 지키고 있다.

지난 83년부터 패션 디자인을 맡은 칼 라거펠트는 샤넬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다.

기성복과 맞춤복인 오트쿠튀르,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활약중인 라거펠트는
브랜드의 문화적 유산에 걸맞은 열정과 독창성, 그리고 고급스러움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또한 샤넬의 정신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그는 샤넬이 최고의
디자인 하우스에 남아있기 위한 변화를 시도했다.

근본 스타일은 잊지 않되 보다 창의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을 시즌마다
제시해 1900년대 초 마드모아젤 샤넬이 누렸던 개척자 칭호를 다시 이어받고
있다.

또 다른 거장은 향수병과 포장지, 심벌을 디자인하는 자크 엘루다.

그는 디자인계에서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코코, 에고이스트 등의 샤넬
향수병과 샤넬 시계를 디자인한 주인공이다.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등 창업자의 신념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