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풍속이 어떠한가? 내가 들으니, 백제의 남은 풍습이 아직도
없어지지 아니하였다는데, 그러한가?"

성종이 이렇게 묻자 도승지 홍귀달은 "도망한 노비들이 모여 살아 풍속이
강하고 사납다"고 대답한다.

대사헌 이극배는 "이 도의 습속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른 도보다 심할
뿐"이라고 얼버무렸다.

"성종실록(1479.10.1)"에 나오는 기사다.

5백여년전 전라도지역에 대한 정치지도자들의 편견을 이처럼 실감나게
알려주는 자료도 없다.

사관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던 폭군 연산의 시대에도 사관들은 왕의
비행을 모조리 기록했다.

왕이 중국사신을 통해 비단과 진주를 밀수입한 사실은 물론이고 심지어
초상중에 내전에서 말이 교접하는 것을 구경했다는 등 사생활에 속하는
일까지도 빼놓지 않았다.

이처럼 왕의 공식적 국사처리, 비공식적 말과 행동까지 일기체로 25대
4백72년동안 끈질기게 기록해 온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사관의 소임은 극간하는 일이었다.

서거정의 표현대로 "벼락이 떨어져도 목에 칼이 들어가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정신이었다.

왕을 비롯한 권력층도 이들을 포용하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부유한 집안의 아들들이라도 토홍빛 옷을 입고 떨어진 안장에
비루먹은 말을 타고 다녔다.

이들이 기록해온 조선의 역사는 객관성을 인정받아 지금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지정돼있다.

대통령이 물러나면 청와대에는 빈 캐비닛만 남는 것이 우리 관행이었다.

공식문서를 제외하고는 몽땅 사저로 옮기거나 웬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
소각해 버렸다니 뒷날 기념관은 꿈도 꾸지 않았나보다.

적어도 기록문화에 관한한 오늘날은 조선시대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는
꼴이다.

정사아닌 증언이나 회고록속의 야사만 나돌아 학자들은 현대사연구가
조선사연구보다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청와대가 최근 김대중 대통령의 공식 비공식 보고자료는 물론 농담까지
통치사료로 전산화해 남기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독대" 자료는 어렵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옛날에도 사관까지 물리치고 하는 비밀회담인 독대는 간혹 있었다.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계획을 논의한 독대는 유명하다.

이 독대의 결과가 당파싸움에 불을 지른 꼴이 된걸 보면 정치가들의
비밀스런 만남은 장려할 일은 못되는 모양이다.

독대할 기회가 더 많아진 요즘 세상에 그 내용을 빼면 통치사료로 남을게
얼마나 될까.

더구나 오늘날은 진실을 전하려는 사관도 없는 세상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