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굴지의 컨설팅 기관인 딜로이트사는 매일 오후만 되면 사무실 곳곳이
텅 비기 일쑤다.

상당수 직원들이 낮잠을 자기 위해 슬그머니 자리를 비우는 탓이다.

회사측은 그러나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낮잠을 권유하고 있다.

이를 위해 최근 빌딩 한켠에 수면실을 개설했다.

적당한 낮잠은 오히려 직원들의 사기와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라는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미국 최대의 철도 회사인 유니언 퍼시픽사는 지난해 근무중 낮잠에 대한
내규를 마련해 시행중이다.

기관사 등 승무원과 엔지니어들에게 교대로 하루 45분씩 낮잠을 즐길 수
있게끔 규정했다.

유니언의 경쟁사인 벌링턴 노던사도 곧바로 같은 내용의 제도를 도입했다.

이처럼 기업들이 낮잠 양성화에 나선 것은 요즘 직장인들이 만성적인 수면
부족을 겪고 있기 때문(데니스 홀란드 유니언사 총무 담당 이사)이다.

전문 조사기관들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주중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최근
6시간 58분에 불과하다.

이는 두세대 이전에 비해 20% 이상 줄어든 수준이다.

전문가들이 권고하는 적정 수면 시간에 비해서도 1시간 이상 부족하다.

이같은 밤잠 부족이 미국 직장인들의 생산성 저하로 연결되는 것은
불문가지다.

더구나 최근 폭발하고 있는 정보화 혁명은 미국인들의 밤잠을 더욱 줄여
놓고 있다.

하루 24시간 서비스되는 인터넷 검색이나 온라인주식 거래, TV 프로그램
시청 등에 정신을 빼앗겨 취침 시간을 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
이다.

밤잠이 충분치 않아진 직장인들에게 최소한의 낮잠은 생산성 저하를 막는
최선의 방책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때로는 20분 정도의 낮잠이 2~3시간 이상 맑은 정신으로 업무에 집중케
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런 낮잠의 순기능에 주목하는 기업들이 날로 확산되는 추세다.

실리콘밸리의 첨단 기업들 사이에서는 수면실 설치가 붐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수면실내에 안락의자및 담요, 자명종 시계와 수면을
돕는 클래식 음반까지 제공한다.

영국의 브리티시항공은 국제 장거리 노선을 취항하는 조종사들에게 낮잠을
허용하고 있다.

심지어 미 육군 당국도 군인들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낮잠을 즐길 것을
권유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해당 직장의 당사자들중 상당수는 아직도 근무 시간에 낮잠을 자는
것은 뭔가 꺼림칙한 행위라는 자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직장인은 "낮잠을 자다가 코라도 곤다면 무슨 망신인가"
라며 가끔씩 수면실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잠시 눈을 감은채 음악을 듣고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기업들 중에서도 낮잠 양성화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쪽이 적지 않다.

채용 인원 기준으로 미국내 최대 직장인 월마트사의 경우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 회사는 81만5천명에 달하는 임직원들에 대해 잠깐의 기분 전환을 위한
휴게실 이용은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근무 시간 중 낮잠을 자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불가를 고수중이다.

회사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근무중 E메일이나 컴퓨터 게임 등에 빠져
시간을 허송하는 직원들이 적지 않다며,그런 터에 낮잠까지 허용한다면
근무기강이 더욱 해이해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낮잠 양성론자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낮잠은 인체의 생리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것이라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의사들은 낮잠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점심 식사 때 포식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속설도 일축한다.

오후에 졸음이 몰려오는 것은 생체리듬에 따른 현상으로 점심의 과식
여부와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낮잠 양성화를 둘러싼 이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
하다.

상당수 직장인들이 이미 근무 시간중 낮잠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 조사기관인 전미수면재단에 따르면 미국 성인들 가운데 38%는 최소한
1주일에 한번 이상 낮잠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평균 낮잠 시간은 1시간을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적지 않은 미국 기업들이 낮잠을 양성화해 나가고 있는 이유를 알만 하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