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터넷 소매업체인 마더네이처(Mothernature.com)사는 간부 사원을
채용할 때 특이한 조건을 한가지 내걸고 있다.

"먼젓번 직장에서 의사 결정과 관련해 뼈아픈 실수를 경험한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라는 뼈저린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유사한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며 매사에 심사숙고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라는게 마더네이처측
설명이다.

이 회사의 마이클 배럭 사장부터가 과거 직장에서의 "실패 전과자"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출신인 배럭은 10여년 전 불과 30세의 나이에 외형
1억달러짜리 가구회사의 부사장 자리에 오를 만큼 전도가 양양한 기업인
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모험의 길을 찾아 커툰 코너라는 어린이용품 회사로 자리를
옮긴 그는 처절한 실패를 맛봤다.

업계 선두주자인 디즈니 스토어를 따라잡겠다는 일념으로 무리한 사업
계획을 밀어붙인 탓에 입사 3년만에 회사를 부도내고 만 것이다.

졸지에 거리에 나앉은 그를 반겨주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는 듯 했다.

그러나 마더네이처사의 지주회사이자 벤처 캐피털업체인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사가 그의 이력서를 주목했다.

실패 경험이 오히려 그에게 보약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배럭이 이끄는 마더네이처는 모회사인 베세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창업 1년여만에 천연 상품 분야에서 단연 업계 선두주자로 뛰어올랐다.

"실패와 배고픔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경영 의사 결정을 내릴 때보다 신중
하고 세련된 접근을 하게끔 만들었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실패 경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안정감있게 일을 처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배럭 사장의 말이다.

미국의 최고 경영자들 가운데 실패한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지는
않다.

오늘날 "성공한 경영자"의 대명사격으로 꼽히고 있는 시스코 시스템스의
존 체임버스 사장과 테러다인사의 알렉산더 다벨로프 회장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이들은 과거 소속 직장에 엄청난 피해를 끼친 실패 경력자들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미국 기업계에서 이런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사고 경력자"들에게는 입사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들을 보는 미국 기업들의 눈이 달라졌다.

인터넷 분야의 벤처 기업들 만이 아니라 포천지 선정 5백대 기업에 속하는
업체들까지도 사고 경력자들을 적극 채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은행과 회계법인들 사이에서도 "사고
경력자 구인 붐"이 일고 있다.

단적인 예가 월가 유수의 회계법인인 딜로이트 투쉬다.

딜로이트는 최근 경영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입 사원들만 채용했던 불문율을
깨고 30,40대의 "중고사원"들을 적극 채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비즈니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실전 경험자들이 필요하다. 실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한두번의 실수는
오히려 이들이 열심히 직무를 수행했음을 반증해 주는 징표일 수 있다"는게
딜로이트사의 짐 월 인사담당 이사의 얘기다.

부동산 개발 회사인 아메리칸 몰즈 인터내셔널사 역시 실패 경험자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대표적 직장중 하나로 꼽힌다.

이 회사의 아널드 코헨 일본담당 사장은 소매 영업 분야에 관한한 미국내
최고 실력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재주가 많은 만큼 실패 경험도 많다.

과거 패션업체인 런던 포그와 투데이스 맨, J 피터맨 등 3개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그는 의사 결정의 실수로 각각 해당 회사의 매장을 도산시켰던
장본인이다.

아메리칸 몰즈사는 그러나 그의 실패 과정을 면밀히 조사한 뒤 "충분히
활용 가능한 인재"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게 3전4기의 기회를 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국 기업들 사이에 일고 있는 이런 흐름에 대해 스탠퍼드대 경영
대학원의 어브 그라우스벡 교수는 "기업들이 실패 경험을 오히려 훈장으로
여기는 풍조가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경영 평론가인 낸시 에버하트는보다 의미심장한 해석을 덧붙인다.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는 자신의 능력 한계에 도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좌절을 맛봤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실패를 저지른 사람들이 오히려 주가를 올리고 있는 곳, 그것이 바로
요즘의 미국 기업들이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