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 디자인문화비평 편집인 >

앞으로 1백년 후인 2099년10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1세기 문명의 회고와 전망전"이 열렸다.

1백년 전 같은 장소에 많은 관람객들이 모여들었던 "20세기 문명전"에
비하면 인적이 드물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박물관에 가는 대신에 온라인 가상현실로 집에서 관람했기
때문이다.

전시 방식이야 어쨌든 이 전시에는 삐삐 핸드폰에서부터 통합정보단말기,
가상현실 안경과 데이터 장갑, 입는 컴퓨터, 애 봐주는 비디오, 전기 자동차
등 "일상 생활유물" 6백여점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한 세기를 증언하고
있었다.

제1기획전시실에는 21세기의 생활상을 시대별로 정리한 "그땐 그랬지",
삶의 변화를 주제별로 지시하는 "아하! 저렇게 변했구나" 등이 펼쳐졌다.

흥미로운 것은 놀라운 기술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상은 지난 20세기와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뇌물용 가방의 역사"는 쉽게 지나칠
수 없다.

007가방 사과상자 등이 21세기 전환기에 "골프백"으로 바뀌어 세기의 중반에
전자화폐의 출현으로 사라진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박물관 직원이 골프백에 지폐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관람객들의 질문에 답도
해주고 직접 돈을 넣어볼 수 있게 하는 관객과의 참여행사도 있었다.

총명한 한 아이가 당시 "어른들이 전자신용카드를 쓰지 않고 왜 그렇게
무거운 가방을 낑낑 들고 다녔는지" 의아해했다.

아이를 데려온 젊은 엄마가 "당시 어른들은 힘들게 노동을 해야만 살 수
있었단다"고 말했지만 정작 자기도 모르는 대답을 아이에게 들려주었는지
머쓱해 했다.

제2기획전시실의 "영상민속실"에서는 영화와 더불어 각종 방송매체에서
다뤄진 보도 영상물이 관람객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특히 전시실 한켠의 작은 방에서 한국영화사의 문제아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과 1999년8월에 열렸던 "옷 로비 의혹사건 청문회"가 동시상영됐다.

관객들은 배꼽을 잡고 웃으며 나왔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장 감독의 거짓말이 청문회 제목으로 뒤바뀌었다는
우스개도 나왔다.

전시실 앞에 등급보류판정을 받았다는 장 감독의 영화는 배우들이 옷벗고
적나라하게 성표현을 했다고, 옷 로비 청문회는 어떤 사모님이 은밀하게
로비용 모피옷을 걸쳤다는 의혹 때문에 크게 사회문제가 됐다는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관람객들은 과거 사람들이 꽤나 헷갈리는 위선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얘야, 나 어렸을 적엔"이라는 제목의 세 번째 전시실은 "민속품"으로
꾸며졌다.

옛날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는 "공주병"과 "왕자병"에 걸린 젊은이들이
신었던 앞이 뾰족한 길고 굽은 구두와 함께 각종 "공주옷"들이 전시됐다.

서양동화의 영향을 받은 사회상은 시멘트건물 옥상에 한결같이 유럽 중세
성곽의 종탑 모양을 한 결혼식장의 모형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공주병 증세는 젊은이들의 유행을 뛰어넘어 부유층의 신분과 재력을
상징하는 사회상을 반영했던 모양이다.

그 앞에 가상 홀로그램으로 값비싼 공주옷을 입고 비디오 촬영에 열중인
신부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소개됐다.

그들은 한결같이 엄동설한에 목과 팔이 드러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입술과
팔뚝이 시퍼렇게 변해도 촌스런 포즈를 취하려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한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저사람들 돌았나봐!"

요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최중인 한 전시회를 보면서 후손들이 우리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볼지 몇 가지 단상을 상상해 보았다.

우리가 인공적 건물, 사물, 이미지와 함께 살아가는 어떠한 모습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질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라지지 않는 비리와 부패, 무지하고 야만적인 제도, 우상숭배적인 맹목적
소비, 이에 기생하는 디자인 등으로 심각한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우리의
생활문화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알면서도 쉽게 치료되지 않는 이 질환들을 다음 21세기에도 계속 떠안고 살
것인가.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최첨단 기술에 대한 논의밖에 없는 듯하다.

이제부터 단순히 마구 만들어 막 사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총체적인 "삶
자체를 디자인"하려는 문화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생활에 대한 각성과 철학 있는 디자인으로 문화를
만들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만일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산다면 다음 세기 "그땐 그랬지" 전시에서 미래의
후손들은 우리에게 조롱대신에 존경과 박수를 보내게 될 것이다.

< getto@chollian.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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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울대 미대
<>미국 뉴욕대 박사
<>서울대 미대 교수 역임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