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임스 챔피 < 미국 페로 시스템즈 회장 > ]

제임스 챔피 미국 페로 시스템즈사 회장은 경영인이기도 하지만 이론가로
더 유명하다.

90년대 초 미국 기업들에 구조 조정의 새 바람을 일으켰던 "비즈니스
프로세스 리엔지니어링(BPR)"이라는 개념을 창안한 사람이 바로 챔피 회장
이다.

그가 주창한 "리엔지니어링"은 미국 기업들을 강골로 체질 전환시키고
나아가 오늘날 미국 경제를 세계 최강의 반석 위에 올려 놓는 초석이 됐다.

외환 위기 이후 기업 구조 조정이 초미의 현안으로 대두돼 있는 한국
경제계에 챔피 회장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잦은 국내외 강연과 업무 출장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챔피 회장을
보스턴 교외에 있는 페로 시스템즈사 집무실에서 만났다.

이 인터뷰는 한국경제신문이 창간 35주년을 맞아 각국의 대표적 경제리더들
을 만나는 "새천년 경제리더 릴레이 인터뷰"의 첫번째다.

< 케임브리지(미국 매사추세츠주) =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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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재계는 구조 조정이 화두다.

특히 기존의 다각화 경영이 비판의 도마위에 올라 있는 가운데 과거의
유력 재벌들이 선단식 경영을 해체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재계가 우선적으로 유념해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보나.

"지나치게 다각화돼 있는 사업 구조를 전문화 집중화쪽으로 바꿔야 한다.

기업들이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특정 분야에 초점을 맞춰야 최선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비단 한국의 재벌들만이 아니라 지난 20-30년간 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정도를 넘어선 다각화에 매진하는 경향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들 기업의 실험은 대부분이 실패로 귀결됐다.

예외가 있다면 제너럴 일렉트릭(GE) 정도다.

그러나 GE의 경우는 사업을 확장해 나가기 앞서 관련 분야의 인력을 미리
양성하고, 충분한 재정적 기반을 확립하는 등 예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다른 기업들과 구별돼야 한다.

21세기 기업 경영의 키워드는 "초점있는 경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복합 기업을 의미하는 콩글로머리트(conglomerate)라는 말은
경영학 교과서에서 사라질 것인가.

"용어 자체가 사라진다기 보다는 콩글로머리트의 개념이 새롭게 정립될
것으로 본다.

이미 인터넷을 이용하는 E-비즈니스의 출현에 따라 그런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존 경영학 교과서에서는 콩글로머리트를 서로 다른 경기 주기를 갖는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체로 정의했다.

그러나 요즘들어 "소비자들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상품과
서비스를 결합하는 기업체"라는 정의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제는 콩글로머리트 조차 오로지 소비자만을 겨냥하는 "초점있는 경영"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국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대규모
정리 해고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다.

문화적 배경이 상이한 세계 여러 나라들이 미국식 리엔지니어링 모델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지적이 있다.

"동감이다.

구조 조정에는 각국의 문화적 차이가 감안돼야 한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리엔지니어링이나 리스트럭처링은 기업의 업무처리 프로세스를 바꾸는
작업이다.

그 결과 수반되는 대량 실직자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할 문제다.

이 두가지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사회나 기업이 대량 감원에 따르는 부작용을 우려해 필요한 구조 조정을
회피하거나 늦출 경우 그 결과는 자명하다.

기업이 망해 모두가 일자리를 잃는 더 큰 재앙이 닥친다."

-21세기에 세계의 비즈니스 패러다임은 어떻게 바뀔 것으로 보나.

"기업들은 경영의 초점을 소비자와 고객에 맞추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게
될 것이다.

인터넷 등 정보 기술의 고도화에 따라 국가간, 기업간 기술 격차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의 기업들간 경쟁도 보다 치열해지고 있다.

기업들이 무한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결국 고객의 수요를 창출하고 욕구에
재빨리 부응하는 방향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차별화하는 것밖에 없다.

많은 기업들이 고객 제일주의를 구호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뜻을 진정하게
새기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기업들이 그 의미를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인터넷 혁명이 앞으로 30년쯤 뒤에 기업들의 경영 환경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 같은가.

"우선은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기업간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것이다.

둘째로는 모든 비즈니스의 처리 속도가 빨라질 것이고, 셋째로 전통적인
산업간 경계선이 사라지면서 전혀 새로운 비즈니스들이 속속 탄생할
전망이다.

넷째로는 금융 통신 컴퓨터 창고업 교통 등 이른바 정보 인프라 산업 부문
에서 많은 사업 기회가 생길 것으로 본다.

그 과정에서 유관 기업간의 합병 등 합종연횡이 줄을 이을 것이다.

최근 은행 통신 등의 업종에서 초대형 M&A(기업인수합병)가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 신호탄이다."

-뉴욕 타임스는 최근 특집 기사에서 "아무리 인터넷 기술과 전자 상거래
기법이 발전하더라도 유통 등 분야에서는 재래형 기업들이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류 및 창고보관 등 관련 시스템은 상당 부분을 기존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동감이다.

향후 5-10년 내에 거대 규모의 디지털 시장이 출현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같은 디지털 시장은 개인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보다는
기업간 거래(business-to-business)가 주종을 이룰 것으로 본다.

아무리 인터넷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슈퍼마켓이나 백화점 등의 소매
비즈니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간 거래의 경우는 다르다.

앞으로 5~10년내에 모든 기업간 거래의 80~90%가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질 전망이다."

-요즘 기업들이 "새 천년 준비"를 서두르면서 저마다 "좋은 기업" 또는
"강한 기업"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좋은 기업과 강한 기업은 어떻게 다른가.

21세기의 기업상은 무엇인가.

"양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나쁜 기업이 강한 기업이 될 수 없으며 반대로 약한 기업이 좋은 기업일
수도 없다.

강한 기업은 임직원들이 일하기에도 좋은 기업일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강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에 초점을 맞추고 시장
및 주변의 상황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민첩성을 갖춰야 한다."

-좋은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노사 문화를 형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도 중요하다고 한다.

어떤 노사 문화가 바람직한 것인가.

"종업원들에게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나는 종업원을 고객이나 주주보다 더 소중하게 대하는 경영자를 능력있는
경영인이 되기 위한 으뜸 덕목으로 꼽는다.

미국 항공사들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종업원을 존중하는 회사가
고객에게도 잘 대하게 마련이다.

요즘 상당수 미국 기업들이 실적 및 주가 관리 등에 매달리면서 지나칠만큼
주주들에게 경영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매우 근시안적인 소치다.

종업원과 고객을 제대로 대하면 주가는 저절로 잘 관리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종업원을 잘 대하는 것인가.

"종업원들에게 확고한 주인의식을 심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 기업의 소유 구조가 종업원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공유되도록
해야 한다.

특히 고위 경영간부들에게 집중돼 있는 스톡 옵션의 혜택을 일반 종업원들도
폭넓게 누리도록 할 필요가 있다.

지금같은 구조 아래에서는 리엔지니어링이나 리스트럭처링의 과실을 소수의
고위 기업 간부들만이 누리게 돼 있다.

기업 과실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종업원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경영자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좀더 얘기해 달라.

"임직원들에게 회사의 비전을 제시하되 신나고 가슴 설레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중간 간부들을 그 비전에 맞춰 변화시키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

대부분 기업을 보면 최고 경영자와 일반 직원 사이에 있는 중간 간부들이
상황 전개에 걸맞는 변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종업원들을 냉소적으로 만듦으로써 기업의 총체적인 능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

-한 나라의 기업들이 강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업 스스로의 노력
못지 않게 정부의 환경 조성이 중요하다고 한다.

21세기에 부응할 수 있는 "좋은 정부"는 어떤 모습인가.

"시장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는 작은 정부가 좋은 정부다.

민간 부문에 의한 자율적인 경제 운영을 최대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특히 인터넷 시대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민간 기업가들의 창의를
요구하고 있다.

공직자들은 정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근시안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오히려 더 강조되고 있다.

외환 위기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구조 조정을 진두지휘
하는 일이 정부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대기업 그룹들간 빅딜을 방법과 시한을 지정해 요구하기도
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정보 기술 혁명으로 인한 상황 변화는 작은 정부의
필요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인터넷 덕분에 생겨나고 있는 새 비즈니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창의가 한층 더 존중되는 풍토가 절실하다.

정부는 이를 위한 인프라를 조성하는 데만 전념해야 한다.

요즘들어 절감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지도할 수 있다고 믿는 정부는 이미
스스로가 오도되고 있는 것이다."(챔피 회장은 이 말을 특히 강조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 기업들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

"지난 94년에 귀지(한국경제신문)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많은 기업인들을 만났는데 한국의 경영자들이 일본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기업인들에 비해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등 훨씬 더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기업들은 전반적으로 간부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기업들의 적정한 간부 숫자를 산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사업 구조에 대한 설계를 하다 보면 적정한 간부 비율이 자연히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기준에 비춰 볼 때 한국 기업들은 간부가 많은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