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호 < LG상사 대표이사 shlee@lgi.lg.co.kr >


환절기 독감이 한번 찾아오고 떠나가니 가을이 되었다.

환절기 독감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독감은 유난히 지독한 것이었다.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 맞이한 가을이라 그런지 올 가을은 예년과 달리
감흥이 새롭게 다가온다.

바짝 내곁으로 다가 와 앉아 있는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한 가을하늘이 더욱
정겹다.

삶의 모든 익숙한 것들이 나이가 들수록 갑작스럽게 새삼스러움으로
다가오는 경험의 빈도수가 많아짐을 느낀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 등으로 쏟아지는 가벼운 햇살, 둥둥 떠다니는
공기의 가벼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등등...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어느 한순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일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다.

따사로운 주말 오후 갑작스럽게 방문한 친구가 유난히 반갑고, 가벼운
책을 읽다 오랫동안 못보았던 친구들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를 때 슬며시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도 그러하다.

그런가하면 기계적으로 반복하던 출퇴근길이 오늘도 변함없이 지속된다는
사실조차 감사하며 저녁을 마치고 차를 마시며 가족들과 담소하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다.

이전엔 느끼지 못하던 삶의 사사로운 일상들이 새삼스러워지는 것이다.

삶의 여유때문인가.

바쁘게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오다 보니 그동안 보석처럼 영롱하지만,
너무도 작아 잘 보지 못했던 삶의 작은 단편들이 이제 슬며시 보이게 된다.

아울러 그 안에 담긴 소중한 의미와 진실들도 말이다.

50줄을 넘어서 깨달은 삶의 개안이랄까.

이제는 작고 일상적인 것들의 소소함을 즐길 수 있는 여유도 내 안에
생긴듯하여 스스로가 대견하다.

익숙한 것들, 사소한 것들이라고 하여 내팽개쳤던 그 모든 일들이 지닌 작은
의미들을 깨닫는 즐거움들을 앞으로도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이 소중한 경험들을 주변의 아는 사람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

이렇게 마음을 다지고 나니 다가온 가을뿐만 아니라 다가올 겨울이 더욱
기다려지고 기대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12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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