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 창1동에 사는 김모(69) 할아버지.

잔병도 없어 동년배보다 건강한편이다.

아들집에 더불살이하는 김 노인에겐 TV가 유일한 낙이다.

TV방영시간대엔 집에서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때우는 게 고작이다.

1일 오전 12시 아침방송이 끝나고 TV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할아버지는
마치 약속이나 있는 듯이 집을 나섰다.

그가 찾은 곳은 동네 노인정.

그는 한참 판이 벌어진 내기 바둑판을 기웃거렸다.

잠시후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1천원짜리 2장을 꺼내 한 노인과 내기
바둑을 뒀다.

노인정에서 점심을 때운 김 할아버지는 오후들어선 1점당 1백원짜리
"고스톱판"으로 소일거리가 바뀌었다.

"돈독이 올라서 투전을 하는 게 아니예요. 할일이 있어야지요.
갈 곳도 없어요"

자신은 점당 1백원짜리로 만족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화투판에 맛을 들인 끝에 아예 투전판을 전전하게 된 노인도 있다는 것이다.

노인들이 갈곳이 없다.

기껏해야 집과 경로당을 다람쥐 쳇바퀴돌듯 오갈 뿐이다.

"일거리"는 언감생심이고 여가를 활용할 곳도 없다.

"평생교육"은 말 뿐이다.

노후를 유익하게 보낼 "사회적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노인 프로그램은 사실상 전무한 형편이다.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노인들이 정기적으로 다니는 곳은 절반이상이
교회나 사찰 등 종교단체다.

4명중 한명 꼴로 사교단체에 가입해 있는 경우도 있다.

문화활동과 봉사활동 단체 가입률은 각각 0.7% 씩에 불과하다.

경로당은 전국에 3만5천1백43개소에 달한다.

이곳을 찾는 노인 회원들도 1백66만명에 이르지만 이곳은 단순히 "시간을
죽이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평생 터득한 삶의 지혜를 사회에 마음껏 쏟아내는 노인들도 적지는
않다.

방배동에 사는 김모(66) 할머니는 매주 세번씩 지체아 수용시설을 찾아
"수발"을 들고있다.

목욕을 시켜주고 말벗이 돼주는 일이다.

육체적으론 여간 힘들지 않지만 보람이 더 크다.

성동구 응봉동의 최모(70) 할아버지는 근처 경로당에 "어린이한자교실"을
개설해 강의를 하고 있다.

손주뻘 어린이들에게 한자경구를 통해 선인들의 지혜를 가르치는 일이 여간
즐겁지가 않다.

6개월전부터 "일"을 하면서 밥맛까지 좋아졌다며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는다.

강의준비를 위해 "공부"까지 해야 해 쉴 짬 조차도 없다고 한다.

노인 대책의 핵심은 일선에서 은퇴한 뒤 숨을 거둘 때까지의 기간을 얼마나
알차게 보낼 수 있느냐에 있다.

선진국에서는 노인들의 "문화 생활"을 복지 측면에서 접근해 경제적인
지원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적어도 갈 곳이 없어서 집에서 놀게 하는 일은 없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멀어진 채 질환과 씨름하고 있는 한국의 노인들.

고된 말년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무료함"이다.

은덕을 갚아야할 부모세대라는 정서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노인은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할 미래의 주역이다.

젊은이들 또한 미래의 노인이다.

노인 문제를 풀지 않고는 복지국가가 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 남궁덕 기자 nkdu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일자 ).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