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저질스런 드라마가 온종일 공공연히
방영됐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열하룻동안의 대하드라마였다.

제목은 "옷로비 의혹과 파업유도의혹 진상규명".

통상적인 드라마는 결론을 가진다.

해피엔딩이라든지 아니면 가슴에 잔잔한 감동정도는 남긴다.

그러나 이번 청문회는 그야말로 전파낭비로 끝났다.

뿐만 아니라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진상규명을 한다고 벌여놓은 판이 "변명과 거짓말의 한마당"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캐스팅은 화려했는 데도 말이다.

서슬퍼런 칼을 휘두르던 사정의 책임자들, 전직 고관 부인들, 국회의원들,
그리고 현재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고위 공무원들.

이렇다면 어느 정도 드라마적 재밋거리는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흥행에 실패했다.

왜일까.

주연이랄 수 있는 국회의원들이 제 역할을 못해서다.

어설픈 연기를 하는 배우가 주연으로 나왔으니 그 드라마가 성공할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번 청문회 드라마는 수준이하의 낙제점을 받았다.

당리당략적인 계산된 소란, 개인과시형 발언, 사건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
없는 질문들이 청문회기간 내내 홍수를 이뤘다.

게다가 중복되는 질문에 고장난 레코드판 같은 답변, 그리고 국민 모두가
망국병이라고 지칭하는 지역감정조장 발언이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이런 무책임한 선량들 때문에 국민이 입은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돼
버렸다.

인간사회를 지탱해주는 도덕과 양심의 기반이 무너졌고 민주주의의 기반인
토론문화가 완전히 왜곡돼 버렸다.

이제 국민들 사이에는 "이대로는 안된다"는 여론이 급비등하고 있다.

정치혐오증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여야간에는 벌써 몇개월째 정치개혁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그 협상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선거제도가 가장 주요한 쟁점으로
논의되고 있다.

선거제도가 마치 정치개혁의 전부인양 돼 버렸다.

그 속내는 뻔히 보인다.

각 당은 내년 총선에서 의원 한명이라도 더 늘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목적이 이럴진대 협상이 잘 진행되기를 바라는 건 무리다.

엄격히 말해 선거제도라는 하드웨어를 손댄다고 정치가 일신될 일이 아니다.

또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프트웨어가 완전히 업그레이드 되지 않고 깨끗한 정치판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에 다름아니다.

여기에는 정치지도자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모든 기득권을 내던져야 한다.

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한 정치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국민회의가 신당을 만들고 한나라당이 제2창당을 하겠다고 외치고 있지만
이는 새로운 집을 짓는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국민들은 그 집에 살게될 지도자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무엇이
달라질 것이냐고 냉소적이다.

아랫사람을 아무리 물갈이해도 정치문화가 변화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우리가 여러번 체험했다.

40여년의 정치역정 속에서 숱한 교체가 있었고 그럴싸한 명분들을 내세웠지
만 과연 어느 정도 국민의 공감을 받았는지는 반성해 볼 일이다.

지금의 15대 국회만 해도 국회의원의 45%가 교체됐다.

그렇다고 정치발전이 이뤄졌느냐 하면 그 대답은 결단코 "노(no)"다.

이런 점에서 볼때 정치개혁의 본질은 돈 안드는 선거를 통해 고품질의
선량을 뽑는 것이다.

여기에 충실해서 들여다보면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해진다.

우선 정당 총재가 자기 지분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공천권과 자금동원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투명성이 확보된다.

재벌개혁과 함께 재벌회장들의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은 진흙탕속에
한발을 넣고 있다면 이는 자가당착의 모순이다.

둘째는 공천의 민주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정당의 총재가 지금까지 처럼 전권을 틀어쥐고 좌지우지한다면 검증된
사람이 대표로 뽑히기는 어렵다.

공천권은 지구당에 되돌려져야 한다.

이것은 풀뿌리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셋째는 정당의 구조를 과감히 혁파해야 한다.

중앙당조직을 대폭 축소하고 지구당은 최소한의 연락기능만을 살려두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이것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돈안드는 정치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개혁을 하다보면 사자도 만나고 당나귀도 만날 수 있다.

자칫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한 집단의 이익이 다른 집단으로 옮겨가는 정도의
"우"를 범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청문회를 통해 나타난 민심에 모든 정치인은 뼈저린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 youngba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