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가튼 < 예일경영대학원장 >

작년 이맘때 세계경제는 한 오라기 실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러시아는 모라토리엄(부채상환유예)을 선언했고 미국의 대형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는 파산위기에 몰렸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세계 금융시스템을 파멸로부터 구하기
위해 금리를 낮출 채비를 하고 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달라졌다.

유럽과 일본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고 한국과 태국 멕시코 등 신흥시장들도
위기에서 벗어나는 기미가 역력하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작년 가을 한 연설에서 "50년만의 최악의 국제
금융위기"라고 규정했던 사태가 잔잔해지고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현안들이 풀리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다.

신흥시장의 수백만명이 일자리를 잃거나 파산, 가난속으로 내동댕이쳐져
있다.

더욱이 세계는 위기를 겪고도 안전한 경제시스템을 새로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거의 없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 상황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올 8월이 작년 이맘때에 비해 왜 좋아 보이는지 검토해 보자.

지난해 가을 FRB의 절묘하고도 시기적절한 금리인하는 세계경제의 전환점이
었다.

금융불안이 안정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미 금리인하에는 행운도 뒤따라 국제자금이 빠른 속도로 아시아로 돌아갔다.

이는 80년대 남미가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은행들이 대출을 재개하는 데
10년이 걸린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긴축정책을 동원, 시장안정에 한몫했다.

그러나 신흥시장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약속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마구 써대는 옛시절로 돌아와 있다.

개발도상국들중 어떤 나라도 근본적인 개혁을 수행하지 않았다.

"새로운 금융구조"를 갈구하는 목소리는 사그라들었고 이제는 여운조차
남아있지 않다.

신흥국가들의 고질적인 연고(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는 그대로
살아있다.

이들 국가의 지도자들은 건전한 금융 규제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으나
서구기준을 충족시키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걸릴 것 같다.

기업파산법을 비롯해 선진 금융메커니즘을 구축하는데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들끓었던 개혁논쟁들의 강도도 약해졌다.

신흥시장의 단기자본이동이 규제돼야 하고 민간 금융기관들도 외채가 많은
나라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목소리들은 잦아들었다.

얼마전 월가와 워싱턴의 최고위 관계자 20명을 만났다.

위기가 왜 발생했고 재발방지를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그들의
견해를 듣기 위해서였다.

각자 의견이 달랐지만 한가지 점에서만은 일치했다.

세계가 앞으로 수년간 계속되는 금융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세계 금융시스템이 여전히 취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금융시스템의 약한 고리는 일본처럼 닫힌 사회로부터 열린 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긴장을 늦추고 있는 신흥국들에 걸쳐 널려 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금융시스템을 감독하는 정부의 능력과 금융시장
움직임간의 갭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지금 가장 염려되는 것은 지난 몇년간 세계경제를 떠받쳐온 미국경제의
위기가능성이다.

최근 인터넷 관련 기업들의 혼란-이들중 40%는 현재 주가가 공모가를 밑돌고
있다-은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는 듯한 미국증시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달러가치하락 압력도 뭔가 미국경제가 잘못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달러약세와 노동시장 경직으로 FRB가 금리를 추가
인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금융시장이 불안해지고 경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자신감도 흔들릴 것이다.

그로인한 경기후퇴는 성장속에 감춰져 있던 엄청난 가계부채와 고삐풀린
망아지같은 헤지펀드 등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노출시킬 수 있다.

해외에도 약점이 있다.

지난 몇년간 중국은 고맙게도 위안화 가치를 안정시켜 왔다.

그러나 지금은 위안화 평가절하 압력을 계속 받고 있다.

중국이 위안화를 평가절하한다면 이웃 신흥시장들의 회복세를 꺾어놓을
것이다.

남미경제의 튼튼한 기둥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올해 성장률이 마이너스 3.5%로
떨어질 전망이다.

아르헨티나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지난번 태국
외환위기를 생각해 보라.

태국위기가 아시아 러시아 남미로 확산되지 않았는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전부 들춰보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것이 가까워져 있다.

더구나 세계금융시스템의 기초는 여전히 취약하다.

물론 지난해 이맘때처럼 행운이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행운을 바라는 것은 총알을 몇개 더 넣고 러시안 룰렛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 정리=김용준 기자 dialect@ >

-----------------------------------------------------------------------

<>이 글은 미 상무차관을 역임한 제프리 가튼 예일경영대학원장의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 기고문을 정리한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