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 아주대 교수 / 환경도시공학부 >


25일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의 만남이 있었다.

청와대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영광이다.

요즘은 국제화시대로 우리나라 사람도 유명해지면 백악관에도 초대받곤
한다.

만약 이런 모임이 백악관에서 있었다면 대통령이 경영 고수들에게서
국가경영에 대해 한 수 배우는 자리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8.15경축사를 통해 재벌개혁 카드를 내놓은 이후라 텔레비전에
비친 총수들의 모습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편안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과거 이런 자리에서 재벌의 빅딜이 약속되고 강요되고 채근되었다.

지금 재계가 납작 엎드려 있는 형상인데 대통령이 주재하는 자리에서 무슨
쓴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회의에서는 대개 지시는 있어도 대화는 없는 법이다.

재벌총수들은 묵묵히 들었을 것이고 관련 장관들은 대통령의 "말씀"을 한
자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국가 총수이다.

아무리 재벌개혁이 국가의 중요 대사라 해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당사자
들을 불러 채근하며 정책결정을 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정부의 경제정책의 핵심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잘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손이, 더구나 힘을 가진 손이 개입하면 시장은 왜곡된다.

재벌이란 경제학적으로 제대로 정의되지도 않은 상태다.

나라마다 조금씩 특성이 다르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유의 공룡기업군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방만한 빚잔치가 오늘의 IMF 원인이기도 하다.

당연히 개혁의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재벌이 나라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큼 공룡화되었다고 하지만
외국의 다국적기업 하나 규모밖에 안된다.

가령 마이크로소프트 주식 60%면 한국기업을 몽땅 살 수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선단식 집단식 경영을 해왔을 것이다.

일본의 미쓰이 선단 규모가 8백여개사에 이르는 데 비하면 우리 재벌의
선단 규모는 역불급이다.

재벌이 황제경영을 한다고 하나, 손오공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듯 권력의
손바닥 위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적마다 재벌들이 눈치를 본다.

미운 털이 박히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안다.

순진하게 굴다가 이유없이 해체된 재벌도 있다.

몇년전에는 거의 모든 재벌총수들이 피고로 법정에 서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동안 재벌부침사를 보면 한국은 기업하기 힘든 나라임에 틀림없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바로 죄인 것이다.

오죽 시달렸으면 재벌 총수가 직접 대권을 잡아보겠다고 나섰겠는가.

그는 유세를 하며 뜨거운 사막 구석구석을 누비고 시장을 개척하던 시절을
회고했을 것이다.

그때의 패기와 결단없이 오늘의 우리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아마도 선거때마다 더더욱 여기저기 넉넉하게 "보험"을 들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정치란 돌고 도는 법이다.

정치가 범람하면, 또 정치권력이 남용되거나 경제문제가 계속 정치논리에
지배되면 이같은 행태는 앞으로도 더욱 심해질 것이다.

시장 쪽으로 흘러야 할 경제가 요즘 자꾸 관에 끌려다니고 있다.

진정한 시장경제라면 기업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주와 소비자이다.

그러나 요즘은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규칙도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바로 "관치"를 넘어 "정치"로 흘러가고 있는 징조다.

미국의 기업들은 본사를 디트로이트에, 샌프란시스코에, 애틀랜타에 두고
있어 워싱턴엔 갈 일이 없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기업들이나 밀라노에 있는 기업들은 본이나 로마에서
벌어지는 정치싸움보다 국제시장의 흐름에 더 관심이 많다.

그야말로 세계경영을 하고 있다.

이들 다국적기업의 경쟁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은 서울 한복판에 본사를 두고 세종로로, 과천으로,
여의도로 주파수를 맞추고 있어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 담박 고위층과 줄을 댈 수 있는 측근이나 동향인사들을
중용한다.

그래야 산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커 왔으니 우리의 기업이 우물 안의 개구리이지 세계시장에 나가
경쟁력이 있겠는가.

이제 기업들을 시장으로 풀어주자.

관이나 정의 사슬에서 풀어주자.

잘못된 것은 법으로 바로 잡으면 된다.

변칙상속 문제는 그동안 허술했던 세제를 잘 관리하면 된다.

상호지급보증과 회계관계는 투명하게 유도하면 된다.

금융지배는 시장에 맡기면 된다.

기업인들이 스스로 개혁하고 신바람나게 시장을 향해 뛰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재벌 해체니 길들이기니 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청와대 모임에 참석했던
재벌 총수들이 앞으로 더 개혁작업에 분발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6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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