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은 원래 귀족과 종교를 위한 것이었다.

밀레(1814~1875)에 이르러 이런 전통과 불문율은 깨진다.

그는 파리근교 퐁텐블로숲 어귀 바르비종에서 생활하며 건강하고 따뜻한
농민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만종"이 유명한건 단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서양미술사상 처음 서민의
삶을 다루기 시작한 소박파미술의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박수근(1914~1965)은 풍경이 아닌 사람, 그중에서도 가난한 이웃의 삶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밀레에 비견된다.

실제로 12살때 밀레처럼 되기를 소망했다는 박수근은 우리시대의 신화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
연명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20세기 한국의 대표작가로 그를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이땅 곤궁한 이들의 표상같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엔 악다구니가 없다.

그림속 여인들은 머리에 보퉁이를 인채 장사를 하거나 아기를 업은채
절구질이나 빨래를 한다.

고단한 표정은 감출길 없지만 꼭다문 입술엔 자식딸린 에미로서의 각오가
엿보인다.

남정네들 또한 허름한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은채 궁핍한 시절을 견디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에 찌들지 않은 서민의 무던한 모습, 일상에 충실한 것이야
말로 보다 나은 내일의 초석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진 이들의 말없음 뒤에
감춰진 힘을 보여준다.

박수근에 대한 화단의 평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나락에 떨어뜨리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한 예술가의 의지와 믿음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소설가 박완서의 글은 무학의 온유한 심성의 화가가 지녔던 단단한 심지와
긍정적 태도를 전해준다.

"그가 그린 나목을 볼 때마다 내눈엔 마냥 춥고 헐벗어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엔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 가슴저리게
신기해지곤 한다"

"나무와 여인" "귀로" 등 박수근의 대표작이 망라된 대규모전시회가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관객 가운데는 학생들이 많거니와 아이들을 동반한 30~40대도 상당수다.

전시회는 9월19일까지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