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침내 결실맺는 경제교류 ]

63년3월 중순 일본 수출산업 시찰을 위해 도쿄에 갔을 때 틈을 내 일본
게이단렌을 방문했다.

먼저 사무국 차장 하나무라씨의 사무실이 있는 일본공업구락부 건물을
찾았다.

하나무라씨는 50여년동안 게이단렌에 근무하면서 오랫동안 상근 부회장직을
맡았다.

한때 소설 "게이단렌"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으며 일본 정계의 "정치자금
파이프라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나무라씨는 말년에 "한일문화교류기금" 회장을 맡으면서 매년 한국을 방문
했는데 필자는 그때마다 자리를 같이 했다.

97년 90세에 세상을 등졌을 때 한일문화교류기금 사무국에서 필자에게
추도문을 부탁했다.

63년3월, 하나무라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한일경제협력기구
설치 문제를 타진했다.

하나무라씨는 이렇게 조언했다.

"일.한관계의 중요성에 비춰 조만간 그 문제도 자연스럽게 제기될 것입니다.
경제인 교류를 하다보면 의당 설치될 것입니다. 서둘지 말고 기다립시다"

드디어 1965년4월21일 도고도시오단장외 45명과 경제인협회측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한.일경협 간담회가 열렸다.

그 결과 양국간 경제계의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서울과 도쿄에서 번갈아
"합동 경제간담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우여곡절도 많았다.

도고 사절단이 도착하는 65년4월20일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여느때보다 1시간 이른 6시30분에 사무실에 나왔다.

2~3일 전부터 사절단 방한을 놓고 서울과 도쿄는 초긴장상태가 됐다.

한.일국교를 반대하는 학생들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일 아침7시께 공화당 사무총장이 나에게 갑자기 전화를 걸어 왔다.

다짜고짜 "사무국장이시오-. 오늘 일본 경제사절단이 오게 돼 있지요"

"네."

"그것을 연기해야겠는데요..."

듣기에 무척 고압적 말투였다.

"아니 이미 도쿄에서는 사절단 전원이 공항에 나와 있을텐데요..."

"오늘 중앙대 학생들이 대대적인 데모를 한다는 정보가 있으니 지금 도쿄에
연락해서 출발을 중지시켜 주시오..."

나는 잠깐 숨을 돌렸다가 "그렇게 못합니다. 어떻게 비행기에 탑승하는
사절단을 중지시킵니까..."

"여보, 사무국장. 내가 그것 모르고 연기하라는 거요. 학생 데모로 불상사가
나면 어떻게 합니까. 출발 중지 해 주시오"

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렇게 안됩니다. 아무리 민간 사절단이라고 하지만 나라대 나라의 합의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국제신용이 뭐가 됩니까..."

그러나 공화당 사무총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이런 상태에서 초청해 불상사가 나면 책임지겠소..."

나는 어이가 없어 단호한 어조로 "왜 책임 문제부터 따집니까. 책임 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지요. 치안유지는 당국의 1차적 임무가 아닙니까"

이쯤 되자 사무총장이 전화를 툭 끊었다.

나는 긴급히 회장을 찾았다.

집에서 장기영 부총리의 연락을 받고 1시간전에 나가셨다고 했다.

조선호텔 조찬회 장소를 알아 봤다.

예상대로 조선호텔에서 장부총리와 조찬중이였다.

"회장님, 공화당에서 일본사절단의 방한 연기 부탁이 왔습니다"

회장은 "그래, 뭐라 했소..."

"지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지요..."

"사무국장은 어떻게 생각하오"

"난관이 있더라도 예정대로 사절단이 꼭 오도록해야 합니다"

나는 김용완 회장이 흔들릴까봐 이렇게 진언했다.

김회장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지금 장부총리와 같이 있으니 내가
이해시키지요..."

그런데 당시 정일권 총리를 비롯 정부에서는 여간 긴장한 게 아니었다.

장부총리는 이 문제로 김용완 회장을 만났다.

"김회장께서 연기 못한다니 그대로 합시다. 정부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9시가 지나자 학생 대표들이 사무국에 몰려 온다는 정보가 들어 왔다.

한.일문제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