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를 한다고 들어앉아 있던 어느 날 밤, TV 명화극장
에서 프랑스의 오래된 애정영화를 보았다.

선병질적인 느낌의 남자 배우 제럴드 필립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나는 그 영화를 보다가 어느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 없는 내 신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후 이십 년이나 연애에 대한 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더니 오십이 넘은
어느 때 슬며시 그런 열망이 소멸된 걸 스스로에게서 발견했다.

의외로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연애에 대한 욕구가 정직하지 못한 성욕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오늘 아침 언제나처럼 등산을 다녀와 사우나로 가는 길에 눈에 번쩍 뜨이는
어린 여자 아이 하나를 보았다.

유치원 가방을 흔들면서 느릿느릿 걸어가는데 지각이 분명한데도 태평한
얼굴이었다.

아직 세상을 모르는 얼굴.

그래서 어쩌면 그 얼굴이 천사였다.

나는 그 애가 나를 비켜 지나가도록 황홀하게 서서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 위로 내 어린 날의 딸 모습이 겹쳐서였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던가.

어린 딸은 내 사랑을 얼마나 원했던가.

나를 얼마나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가.

계산도 하지 않고 상대방의 사랑을 의심도 하지 않고 배반에 대한 불안은
애초 존재하지 않는 관계.

딸자식과 나는 그렇게 사랑했다.

도대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관계가 어디 또
있을까.

아,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눈물나게 화려하고 순결한 사랑을 경험
했느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걷고 있는 내 가슴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 사랑의 추억
으로 뜨겁게 소용돌이쳤다.

사우나에 들어간 뒤에도 이 감동은 쉽사리 스러지지 않았다.

대체로 여자가 남자보다 더 깊고 따뜻하고 희생적이라면, 그건 바로 이런
완벽한 사랑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사랑은 자기 생명을 타인에게 온전히 던져 넣는 것이며, 사람은 그런 경험을
통해 무의식을 확장시키고 자유의 지평을 넓힐 테니까.

사랑이 위대한 힘을 가졌다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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