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은 상식인가 ]

A와 B는 여고 동창이다.

어느날 A여인은 B여인에게 남편이 차를 사려고 하는데 부족한 돈을 꿔
오란다며 남편 명의의 차용증을 써주고 1천만원을 빌려갔다.

그런데 돈을 갚겠다는 날이 다가왔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찾아가 보니
A씨 부부는 그동안 이혼해 책임을 서로 미루기만 했다.

A씨는 이혼시 위자료도 못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은 남편의 차를 사는데
들어갔으므로 남편에게 받으라고 주장했다.

남편은 그 돈이 차를 사는데 들어가긴 했지만 차용증을 쓰지 않았으니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돈을 갚을 재산이 있는 남편을 상대로 빌려준 돈을 갚으라는
소송을 내면 이길 수 있을까.

당연히 남편이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비록 나중에 이혼을 했지만 돈을 빌릴 당시는 부부였고 부부는 일심동체
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남편의 차를 샀다.

차용증까지 있는데 왜 못 이기겠는가.

법은 상식이 아닌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반드시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이와 유사한 사례에서 남편은 갚을 책임이 없다는 판결이 나온 바
있다.

왜 그럴까.

한국은 부부가 혼인 전부터 갖고 있던 재산과 혼인 후에라도 한쪽 명의로
구입한 재산은 그 명의자의 것이라는 이른바 "부부별산제"를 취하고 있다.

인격적으로 부부는 엄연히 별개의 사람이므로 부부사이라도 한쪽 배우자가
다른 쪽 배우자 명의로 돈을 꾸는 등의 행위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원칙대로 하면 남편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이를 제시하고 남편의
법률행위를 대신해야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예외없이 관철하다 보면 일상사에서 불편한 경우가
자주 생길 것이다.

그리하여 민법은 어느 정도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부부의 한쪽이 "일상의 가사"에 관해 제3자와 법률행위를 할 때 다른 한쪽의
배우자는 그로 인한 채무에 대하여 연대책임이 있고 부부는 일상 가사에 관해
서로 대리권이 있다고 규정해 놓은 것이다.

부부는 이같이 일상의 가사에 대하여는 별도 위임장 같은 것이 없이도
서로 대리권이 있다.

때문에 이런 경우 남편 명의로 돈을 빌린 행위가 과연 "일상의 가사"에
포함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일상의 가사"는 부부 공동생활의 유지에 일반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국한된다.

의식주에 관한 사무나 가족의 보호, 오락, 교제, 자녀 양육과 교육 등에
관한 일에 한정되어 있다.

그 외에 일상의 생활비를 초과하는 금액을 빌리는 것, 부동산을 파는 것,
가옥의 세를 놓는 것 등은 일상의 가사를 넘어서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행위를 다른 한쪽의 명의로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대리권이 있어야
한다.

법원은 남편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에 관한 근저당권의 설정, 타인의 빚
보증이나 계에 가입하는 것, 자가용 차를 구입하기 위하여 타인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행위 등도 일상가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판시하고 있다.

따라서 남편 명의로 돈을 빌린 부인의 행동은 일상가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대리권도 없이 돈을 빌렸으니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항상 돈을 빌려준 선량한 사람만 당하도록 돼 있지는
않다.

그런 불합리를 구제하기 위하여 법은 이른바 "표현대리"라는 제도를 두고
있다.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상식적으로 옳게 행동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보호하고 있다.

이 제도는 다소 복잡한 설명을 요하므로 뒤로 미루고 일단 이 점만은
명심하자.

우리는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 혹은 "주머니돈이 쌈짓돈"이라고말한다.

그러나 적어도 법적인 분쟁에서 만큼은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변호사.먼데이머니 자문위원 (02)594-4884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