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 < 한국경제신문사 주필 >


"팬티스타킹식의 경제정책이 러시아경제를 망쳤다"

최근 어느 러시아 언론인이 IMF 등 서방 국제경제기구의 경제전문가들을
원망하며 내뱉은 말이다.

팬티스타킹은 대체로 한가지 사이즈 밖에 없다.(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프리 사이즈라고 부르고 있으나 미국에서는 "one sige fits all"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을 파는 가게에서는 큰 사람이나, 혹은 뚱뚱한 사람한테나 마른
사람한테나 한 종류의 사이즈만을 팔고 있는 것이다.

IMF 같은 국제기구도 한가지 종류의 정책 조합만을 들고 다니면서 도움을
청하는 모든 국가들에 이것만을 사용하라고 강요한다는 것이 이 사람의 주장
이었다.

그 나라의 역사 사회 인종 주변환경 등 상이한 여건들은 무시한 채 금융재정
의 긴축, 고금리, 무역과 외환의 자유화, 공기업 민영화, 물가자유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책 패키지만을 하는 것이 문제이며 러시아는 이러한 처방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정치상황과 경제관료들의 실책들을 생각할 때 이 언론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서방식 경제처방이 갖는 문제점을 흥미롭게
제기한 점은 우리에게도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IMF 체제가 시작된지 1년반이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는 우리도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그간의 정책들을 평가하고 반성하며 새로운 방향의 모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외환 위기로 경황이 없었던 과거에는 우리도 자의든 타의든 획일적인
정책들을 거침없이 도입했고 나중에 고치는 등 시행착오를 되풀이 하였다.

첫째로 대표적인 사례가 재정금융긴측과 고금리 정책이었다.

이것은 IMF의 처방전에는 항상 붙어 다니는 감초와 같은 정책들이다.

특히 고금리 정책은 외자의 유출을 억제하고 유입을 촉진함으로써 외환위기
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차입경영방식에 의존해옴으로써 부채비율이 이미 높아질대로
높아진 우리기업에 대해 이러한 정책은 도산기업수를 늘리고 금융부실 문제를
오히려 확대시키는 부작용만을 불러왔었다.

이는 마치 독감 때문에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열을 내리는데 좋다고
억지로 냉수욕을 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처방이었다.

부작용이 심각해지자 얼마 안있어 우리정부는 IMF측의 양해를 얻어서
금리정책의 방향을 선회하였다.

정부가 점차 여유를 얻게되자 지난달에는 재경부 차관이 미국에서 열린
33개국(G33)회의 석상에서 IMF의 과도한 긴축정책과 고금리정책이 잘못된
처방이라고 까지 공개적으로 지적하게 되었다.

둘째로는 정부가 금융개혁을 추진하면서 BIS 자기자본비율을 들고 나와 이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려 했던 점을 들 수 있다.

금융구조 개편이라는 어려운 작업의 수행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잣대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은행별로 나름대로의 특성과 사정이 있는 데다 그동안 관치금융체제
하에서 위험관리등에 익숙하지 못한 은행들에 대해 선진국 수준의 잣대를
들이 미니 큰 부작용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은행들이 비용 맞추기에 급급하다 보니 금융경색은 더욱 심화되었고
경기침체를 가속화 시켰던 것이다.

당초 정부와 IMF가 3% 정도로 예상했던 98년의 경제성장률이 -5.8%로까지
곤두박질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고금리정책과 BIS비율
고집에 따른 금융경색이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결말이 나지않은 것이지만 대기업 재무구조개선에 관한
정책을 들수 있다.

기업이 자기자본을 확충하고 부채를 줄이는 것은 우리경제의 체질개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모든 대기업들에 대해 크기와 주요업종에 관계없이 금년말까지
부채비율을 획일적으로 2백%까지 낮추도록 한 것은 전형적인 팬티스타킹식
정책발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그렇게 되다 보니 대기업들의 투자및 고용계획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게
되었고 장기적인 경기전망은 극히 불투명하게 되어 버렸다.

또한 기업들은 자산재평가 등의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우선 비율을 맞추고자
하는 한편 증시 활황을 이용하여 대규모 증자를 계획하고 있어 증시의 전망
을 흐리게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정책당국이 하반기의 증자계획을 조정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아져서 자칫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들이 나올 수도 있다.

경기의 동향과 내용, 획일적인 정책의 부작용, 기업의 장기적인 경쟁력 배양
등을 염두에 둔 합리적인 정책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겠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