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 서강대 교수. 경제학 >

반짝인다고 다 황금은 아니듯이, 관청가의 아이디어라고 모두 금과옥조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디어는 반짝일수록 위험천만한 경계대상이다.

경제활동의 경기운영에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온갖 변칙과 반칙을
묵인하면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줄 우쭐대다가 국제무대에서 "왕따"
당한 것이 바로 97년말 환란의 본질이 아니었던가.

우직한 원칙준수와 끈질긴 노력만이 경기의 승부를 판가름하도록 제도와
관행을 뜯어고치는 것이 구조조정이 아니던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없어 경제위기를 맞은 것이 아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현정부와 여당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추진을 표방한다는 슬로건이 홍보되었
지만 경제정책의 큰 밑그림이 불투명하고 그때그때 정황에 따라 임기응변과
편의주의에 이끌린 정책발상들이 반짝이고 있다면 지나친 혹평인가.

땜장이가 아이디어를 내보았자 낡은 냄비의 구멍 메우는 것이 고작이다.

그에게 시장성있는 새 주방기구 만드는 일을 기대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제대로 된 설계사가 필요하다.

경제위기의 진정한 극복방안은 국민경제 흐름의 새로운 물길을 만드는
일이다.

한국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올해 경제성장률이 4%를 웃돌 것으로 보이고 가용외환보유고도 늘었다.

모처럼 일손구하기가 늘어나 실업률 오름세도 주춤하고 있다고 한다.

증시가 달아오르고 있다.

부동산 경기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재벌기업의 재무구조개선 작업이 자산재평가로 눈가림되다 정부의 호통을
받았다.

추락사고가 잦은 항공사 총수는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지만 청와대의 일갈에
후선으로 물러났다.

경제관료의 규제마인드가 고개를 들고, 시장 메커니즘보다 정부명령이 강력
함을 보이고 있다.

해외 논평가들은 조심스럽게 한국의 개혁을 칭찬하고 있다.

며칠전 정부와 여당은 전임노조 임금을 세금으로 지급한다는 아이디어를
검토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노총과 경총의 탈퇴로 사실상 기능정지된 노사정위원회를 다시 궤도에
올리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인다.

"무노동 무임금"은 97년3월 당시 어렵사리 여야합의로 국회통과된 원칙이다.

여당과 정부는 사용자와 정부가 2001년까지 일정액의 기금을 마련, 이 기금
으로 그 이듬해부터 노조전임자의 임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써 2002년부터 전임노조원 임금지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긴 경우 처벌
하도록 개정한 노동법 조항은 무력화될 것이다.

뛰쳐나간 노총을 어우르고, 토라진 경총을 구슬리자니 아이디어가 궁했던
모양이다.

노조전임자는 그가 이익을 대변하는 노조원들이 갹출한 돈으로 보수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경제논리이고 선진국의 사례 또한 그러하다.

새로 조성하는 기금 중 정부부담금은 세금으로, 기업부담금은 제품가격
인상으로 결국 모든 일반국민의 몫으로 돌아간다.

국민경제의 거시적 이익증진에 봉사하는 공무원은 국민이 세금으로 먹여
살린다.

노조활동은 노조 내부자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따라 움직인다.

전임노조원이 공무원인가.

국민은 노동귀족을 부양해야할 봉이 아니다.

이제까지는 놀랍게도 외국의 한국통들이 한국사정을 잘 이해해 주고,
불합리한 구석이 있어도 속아주었다.

전임노조 임금지급방안이 채택되면 이들이 스스로의 오판을 깨닫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경제위기의 화산활동은 잠시 휴식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지표 바로 아래 용암이 꿈틀거리고 있다.

최근 수년간 세계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미국 호경기의 거품 빠지기, 일본
엔화의 약세,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 등 복병이 즐비한 것이 국제경제
상황이다.

국내 정치권, 관료, 경제주체들끼리 치고받고 눈가리고 아웅하는 잔재주를
보면 불안감을 금할 수 없다.

시장경제는 참여자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경기규칙이 적용되는 풍토에서만
꽃피운다.

억지 떼쓰기에 밀리는 무원칙한 심판관 아래에선 국민경제가 난장판으로
전락해 냉엄한 국제무대에서의 왕따를 면할 수 없다.

땜장이의 아이디어는 제2의 환란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