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이 새 노동법에 명시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조항을 폐지
하는 한편 정부와 사용자가 공동으로 기금을 마련, 노조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토록 할 방침이라는 소식은 한마디로 우리나라 노동정책의 무원칙성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라고 할만 하다. 당정이 검토중인 안은 노조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할 경우, 사용자를 처벌토록 한 현행 노동관계법 조항을 삭제하고
정부와 사용자가 2001년까지 기금을 설치, 다음해부터 이 기금에서 전임자의
임금을 지급토록 한다는 것이다.

당정의 이같은 방침은 어떻게하든 노동계를 노사정위원회로 불러들여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보자는 생각일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다. 전임자 임금지급 문제는 지난 97년3월
노동관계법 개정 당시 복수노조허용 문제와 더불어 막판까지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안이다. 결국 경영계의 입장이 관철되긴 했지만 대신 경영계는
복수노조의 즉각 허용 등 중요한 양보를 해야 했었다. 만약 경영계가 이제
와서 복수노조의 불용을 선언하고 나선다면 정부와 노동계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물론 산업평화를 위한 사회적 합의와 대외신인도 제고를 위해 노사정위의
기능회복은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리 노사정위의 정상화가
중요하다 해도 경제논리보다 정치논리를 앞세워 노조달래기에 계속 무리수를
두어선 안된다.

우리가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노동법을 개정한 것은 노동시장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 잘못된 관행중 대표적인 것이 사용자가
노조전임자에게 임금을 주는 것이다. 이는 선진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새 노동법에서는 무노.무임원칙과 더불어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가
명문화됐으며 다만 노조의 재정사정을 감안, 시행에 5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행도 되기 전에 또다시 법을 고쳐 잘못된 관행을 부활시키겠다니
이 무슨 억지인가. 더구나 정부가 사용자측과 공동기금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전임자 임금의 상당부분을 국고에서 지원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전임자에게,그것도 나라에서 임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명분도
없을 뿐더러 무노.무임원칙을 정부가 앞장서 짓밟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임자 임금은 노조에서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만 노조도 사용자
측에 대해 떳떳할 수 있다. 노조의 재정이 문제라면 지금부터라도 경총의
제의대로 노조 스스로 전임자 임금의 일정비율을 적립해 기금을 만든후
2002년부터 지급하면 된다. 전임자 임금을 노조 스스로 책임지게 하면
자연히 전임자 수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정부는 노사정위의 모양새 갖추기에만 급급해 노사관계개혁을 후퇴시키거나
새 노동법의 기본정신을 망각해선 안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