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년전인 1899년 5월8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석학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가 탄생했다.

그는 ''시장경제''의 이론적 틀을 마련하는데 평생을 바친 거목이다.

그의 탁월한 통찰력에 영향을 받은 선진국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됐다.

하이에크 탄생 1백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를 조명하고 하이에크 사상이
한국경제 현실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지를 분석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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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여년간 한국경제를 급성장시킨 동력은 정부주도형 성장정책이었다.

그러나 97년말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정반대의 패러다임인 "시장경제"가
난국을 풀 열쇠로 등장했다.

한국은 21세기를 눈앞에 두고서야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20세기
초 이런 상황을 예견한 천재적인 학자가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이자 20세기 최고의 시장경제 옹호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가 바로 그다.

그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조류학자, 부친은 의사겸 식물학자였으며 형제들은 해부학자와
화학자였다.

하이에크의 학문적 첫사랑 역시 자연과학이었다.

그는 16세 때 이미 고생물학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19세 때 참전한 1차 세계대전은 학문의 행로를 바꿔 놓았다.

11개의 언어가 통용되던 다국적군을 경험하면서 그의 관심사는 사회과학
쪽으로 옮아갔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빈 대학에 입학한 청년 하이에크는 한동안 부의 분배가
세상 문제의 해결책이라 믿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신오스트리아 학파의 거두 미제스를 만나면서 그는 사회주의의
대척점으로 극적인 이동을 한다.

미제스는 하이에크의 학문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

대학시절 "사회주의를 너무 비판한다"는 이유로 미제스의 강의를 싫어했던
하이에크가 사회주의를 맹렬히 공격한 미제스의 저서 "사회주의:경제사회학적
분석"(1922년)을 읽고 자유주의자가 됐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하이에크는 29년 출판한 첫 저서 "통화이론과 경기변동이론(Monetary
Theory and the Trade Cycle)"을 계기로 영국으로 건너간다.

이 저서를 높이 평가한 당시 영국 런던스쿨의 경제학과장 라이오넬 로빈스
가 교수직을 제의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하이에크는 당대의 경제학자 케인스를 만난다.

20세기 두 경제학자의 만남은 "세기의 대논쟁"을 낳았다.

케인스는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합리적으로 수립된 경제계획이나 수요관리
정책은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하이에크는 불완전한 인간이 계획을 통해 경제를 통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정부의 간섭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맞섰다.

개인들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가운데 자연히 질서가 생기고(자생적
질서) 이것이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문명도 발전한다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대표적인 자생질서가 바로 시장이다.

그가 시장과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철저히 옹호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싸움은 케인스의 완승으로 끝났다.

대공황의 고통속에서 자유 방임하자는 하이에크의 처방이 인기를 끌리
없었다.

미국의 뉴딜정책을 필두로 각국 정부는 대공황에 대처하는 정책을 잇달아
도입했다.

더욱이 44년 영국에서 출판한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은
하이에크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했다.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계획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며 사회주의와 케인스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책을 출판한 이듬해인 45년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 책은 미국에서 상당한 환영을 받았지만 역시 케인스의 이론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나 70년대 케인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정부정책은 실패하고 스태그플레이션이 전세계를 덮었다.

하이에크의 이론은 비로소 조명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면서 높은 반열에 올라선다.

하이에크는 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았지만 위대한 철학자이자 법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심리학 정치학 철학 법학 인류학까지 무려 1백30편의 논문과 25권의
저서를 남겼다.

52년 출간된 "감각질서"(The Sensory Order)는 심리학,60년 "자유헌정론"
(The Constitution of Liberty)은 정치학, 73~79년에 잇달아 내놓은 "법,
입법 그리고 자유"(Law, Legislation&Liberty) I~III권은 법학에 커다란
공헌을 한 저서다.

이렇게 방대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는 철저히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했다.

하이에크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케인스도 하이에크를 "논리기계"라고
불렀을 정도다.

청년시절 전쟁을 겪었고, 좌파가 풍미하던 30년대에 자본가의 앞잡이란
비난속에서 살았으며, 케인스의 빛에 가려 조롱당하며 장년시절을 보냈던
하이에크였지만 말년 만은 행복했다.

그는 영국의 대처리즘,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뉴질랜드의 경제개혁 등이
잇달아 성공하면서 자신의 이론이 현실세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지켜
봤다.

88년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치명적 자만(The Fatal Conceit)"을
출판한 이듬해에는 동구의 몰락을 확인하기도 했다.

92년 그는 93년간의 긴 생애를 마치고 눈을 감았다.

"신자유주의"라는 커다란 선물을 인류에 안겨준 채.

< 노혜령 기자 hr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