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우려하던 사태가 시작되고 있다. 노동계가 19일 서울지하철 파업을
신호탄으로 총력투쟁에 나섬으로써 우리의 경제위기 극복노력은 중대 고비를
맞게 됐다. 지하철 파업과 동시에 이날 공공연맹 산하 5개 노조가 연대 파업
에 돌입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하철뿐만 아니라 전기 통신 등 시민생활과 밀접한 기관의
노조로 구성된 공공연맹 산하 20여개 노조의 연대파업으로 분위기를 고조
시킨뒤 5월1일 노동절 투쟁 및 12일 금속산업연맹 총파업을 통해 정부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계획이다.

대표적인 공공사업장인 한국통신 노조도 오는 26일 전면파업에 들어가기로
이미 투표를 통해 결정해놓은 상태다. 온건노선을 취해온 한국노총 역시
노동절 행사를 시작으로 별도의 파업투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마디로 4,5월 노동대란설이 실제로 가시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돼가고 있는데도 막상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다
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중단, 노동시간 단축,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철폐, 산업별 교섭체제 보장 등 노동계의 요구사항은
하나같이 어려운 것 뿐이다. 여기에 주변환경마저 어두워 보인다. 경기회복세
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33년만의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고 2백만명 가까운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성급한 IMF졸업 분위기에 사회적 긴장이 이완되면서 근로자
들의 보상욕구가 가세해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한심스런 것은 정부의 소신없는 태도다. 최근 정부는 사용자측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한채 노동계 달래기에만 급급하다가 경영계마저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노동계도 경영계도 정부에 등을 돌린 상태에서
정부의 조정기능이 발휘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노동계가 현장근로자들의 고용불안 심리를 반영해 강경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일견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불안심리를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표출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시민들의 발을 볼모로 하는 지하철 파업이나 국가의 신경조직인 통신
수단을 마비시키는 등의 공공사업장 파업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지하철 파업에 따르는 불편을 잘도 참아주던 시민들이 이번 사태에
서는 실력으로 항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계는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의 분노폭발은 어떠한 노동운동도 국민적 이해나 공감
없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모든 분야가 고통을 받고 있는 IMF 관리체제 하에서는 노동계의 투쟁방식
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특히 공기업은 기업의 법적 성격이나 공익성을
감안해 집단행동 결행에는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서울
지하철과 함께 파업에 돌입한 데이콤 한국전기안전공사 등 다른 공공연맹
사업장은 물론, 파업을 앞두고 있는 한국통신 등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일부에서는 이번 지하철 파업이 민노총과 정부의 갈등에 따른 "대리전"
성격이 강해 예상밖으로 장기화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지만 명분도 없이
시민에게 불편과 고통만을 주는 파업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 지하철노조가
공공연맹의 대표적인 강성 핵심조직임을 감안할 때 이번 사태의 결말은
앞으로의 민주노총 전체 투쟁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둔 정부의 신속하고도 엄정한 대처가 요청된다.

민주노총은 이번 총력투쟁을 선언하면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라
는 정책기조를 바꾸는 것이 투쟁 목표라고 밝히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구조조정에 따르기 마련인 정리해고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IMF관리체제 하에서 구조조정과 이에 따른 고용조정은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추진돼야 하는 일이다.

지난해 2월 노동계가 IMF구제금융의 전제조건인 정리해고를 받아들여 경제
회생의 전기를 마련했던 것도, 또 많은 대기업과 금융기관에서 뼈를 깎는
고용조정안을 수용했던 것도 구조조정 없이는 한국경제가 되살아날수 없다는
국민적 컨센서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구조조정의 맨 마지막 줄에 서있다고
할 수 있는 지하철공사나 한국통신 등의 공공기관은 상황이 최악이었던 작년
에 비하면 그래도 여유가 있는 편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구조조정을 효율적으로 추진해 신속하게 끝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그만큼 손해이기 때문이다.
노동계의 파업은 구조조정기간과 고통을 더욱 연장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노동계가 단기적 이해에 얽매여 경제환경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할
경우 근로자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수 밖에 없다는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동계가 노사정위를 뛰쳐나와 파업이라는 극한 투쟁을 택하게 된데는
정부의 책임도 크다. 민간기업의 구조조정에서는 가혹하리만큼 밀어붙였던
정부가 막상 자신이 사용자라고 할 수있는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에서는
효율적 대응이 미흡했다. 노사정위라는 대화의 창구를 활용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제1기 노사정위 합의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해 강경투쟁의
빌미를 제공한 감도 없지 않다.

이제라도 정부는 분명한 원칙을 갖고 사태해결에 나서주기 바란다. 노사
양측으로부터 믿음직한 중재자로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파업이 시작된
지금 이 시점에서는 모든 이해집단들에게 법절차의 엄정한 집행자라는
인상을 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치적 계산이나 선거를 의식해
정부가 우유부단한 자세로 일관한다면 불법과 무질서가 판을 치는 끝없는
악순환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앞에 놓인 과제는 합심 협력해도 풀릴까 말까할 정도로 힘겨운
것 뿐이다. 결코 대립과 반목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노사정 모두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이 위기의 봄을 넘겨야 할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20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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